2019년 12월 4일, 친구들과 함께 짧게 도쿄에 다녀오면서 그 여행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언제나 다음 행선지를 머릿속에 염두에 둬놓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일을 해나가는 형태로 지루한 일상을 돌파해나가는 사람이었다. 해가 바뀌어 2020년 1월에는 독일에서 일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 형에게 연락해서 5월에 독일에 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같이 히로시마에 여행을 갔던 일을 이야기하며 독일에 도착해서 대강 어디서 합류해서 어떤 도시를 다녀볼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Covid-19 상황이 시작되었고, 예매했던 루프트한자 비행편을 환불받는 데 몇 개월이 걸렸다. 그리곤 계속해서 다음 하반기, 다음 해, 다다음 해에는 풀리겠지 하는 기대를 거듭해서 배신당하는 2년 7개월이 흘렀다. 지긋지긋한 시간을 견디고 2022년 6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출국을 하기 위해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다. 여행자로 복귀하는 첫 여행지는 베트남 호치민이다.
왜 베트남 호치민으로 가냐고 물어본다면, 미적지근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갈 수 있는 곳 중에 항공권이 제일 저렴하고 (그래도 코비드 이전에 비해선 비싸다), 백신을 접종했다면 격리 또는 번거로운 절차를 진행하지 않아도 되며, 현재 코로나 상황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대한 싸고 빠르게 다녀오기에 제일 합리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호치민은 4년 전인 2018년에 방문했을 때 그리 인상적인 기억이 남지 않은 도시임에도 간다! 이다혜 작가의 책 제목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과 정확히 같은 마음이다. 지금 다시 떠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코로나 이후로 떠나는 첫 여행지이기도 하지만, 여행지 자체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는 상태로 떠나기로 한 여행 또한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혼자 떠났던 나의 모든 여행은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 또는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싶다. 꼭 보고 싶은 곳이 있거나, 꼭 체험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사진찍기 재밌겠다 싶거나 아니면 그냥 이 나라를 인생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까지. 그런 게 전혀 없는 여행이라니!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는 너무 좋은걸? 항공권을 구매한 이후에 찾아오는 겪어본 적 없는 이 기묘한 마음이 스스로 재밌게 느껴졌다. 처음 겪어보는 마음 상태라면 처음 해보는 방식으로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여행방식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을 시험삼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러 나는 이번 호치민행을 나름의 여행-루틴-2.0-실험으로 생각하고 준비해보기로 했다. 이름이 거창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의 여행을 100%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런 여행은 스트레스로 가득한 여행일 테니까, 아무리 실험을 해보더라도 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선에서 해나가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여행이 아니라 버전 업데이트를 한 여행. 세계에 거대한 일이 급하게 또 벌어지지 않는 한 다음 여행도 있을 테니 조급할 필요도 없다. (러시아가 신경 쓰이긴 한다.)
이번 업데이트에서는 어떤 경험을 바꿔볼 수 있을까? 그 첫 번째는 들고 가는 장비의 변화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변화.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최근 2년간 내가 구매했던 전자제품들의 대부분은 '여행 가면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변명과 함께 구매한 것이다. 후지필름의 X100V 카메라, 맥북 에어, 블루투스 키보드, 아이패드 에어와 애플펜슬, 블루투스 스피커, 닌텐도 스위치 OLED형, 크레마 전자책 리더기, 대용량 외장 배터리, 포쉬 프로젝트의 가방(전자제품은 아니지만)까지. 다 나름의 역할을 상상하면서 구매한 것들이다. DSLR을 들고 오래 다니기엔 어깨가 아파서 가벼운 카메라를, 해외에서도 간단한 업무 처리를 위해 맥북 에어를, 여행 틈틈이 촬영한 영상을 기내에서 편집할 수 있게 맥북 에어와 펜슬, 블루투스 키보드를. 내가 출장과 여행 때마다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 (같은 모델을 두 번 구매해 쓰고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가방 옆주머니에 딱맞게 들어가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내가 아는 모든 장소 중에서 책이 가장 잘 읽히는 비행기 기내에서 독서하기 위해 전자책 리더기를 구매한 것이다. 괜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나는 여행을 좀 더 가볍고 즉각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두 번째 업데이트는 운동. 일상에서 했던 운동을 해외의 공간에서도 진행해 보는 것이다. 지금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은 필라테스인데, 현지에서 원데이 클래스로 진행하는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검색을 조금 해봤다. 아무래도 여행지에서 하는 운동이니까 현지인 강사가 있는 곳에서 운동하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게도 짧고 (귀찮은) 검색으로는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곳을 찾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한인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센터에 한국어로 문의해서 여행 기간 내 두 번의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보통 한국어를 최대한 안 쓰고 안 듣는 것이 일종의 여행 속 재미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 운동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수영이나 볼더링 등, 해외라고 해서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은 운동도 도전해보면 재밌을지도.
세 번째 업데이트는 도시와 국가를 배우는 방식의 투어를 체험하기. 보통 혼자 가는 여행에서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가기 번거로운 유적지 등을 방문할 때 일일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다녀오곤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장거리 이동을 위한 투어가 아니라 조금 더 여행지에 대해서 배워보는 프로그램을 신청해 보았다. 물론 투어 프로그램이라는 것 자체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기 때문에, 마치 한국인들은 아무도 안 가는 삼계탕집에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찬 모습의 당사자가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혼자 멀뚱히 다닐 때보다는 더 현지다운 정보와 경험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현재 에어비앤비 액티비티를 통해 예약한 것은 '현지 대학생들이 태워주는 스쿠터를 타고 베트남 남부 음식 탐험'과 '기본 베트남어 배우기'. 하노이와 호치민 총 두 번 베트남을 방문했음에도 할 줄 아는 말이 신 짜오 하나였다는 사실이 약간 부끄럽기도 하다.
네 번째 업데이트는 첫 번째 업데이트를 바탕으로 하는 변화다. 영상과 글을 꾸준히 기록하고 정리해놓는 것. 코로나 이전 나의 여행은 굉장히 단순했다. 열심히 걷고, 열심히 사진 찍는 것.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사진은 열심히 찍을 예정이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보면 사진은 많이 찍게 되니까. 이제는 그 사진 기록에서 글과 영상을 더해 좀 더 풍부한 여행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보자는 취지의 결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핸드폰과 작은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아이패드로 간단히 편집한 수준의 영상으로 만들기로 한다. 몇 번의 짧은 한국 여행을 통해 이런 규칙으로 영상을 만드는 데 익숙해 졌으니 이것을 해외여행에서 해볼 차례. 글도 마찬가지다. 매일 쓰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만 술도 안 마시는 탓에 밤에는 주로 숙소에서 누워 있는 시간을 활용해서 토막글이라도 써보자는 결심. 꽤 즐겁게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결심이다.
누군가 MBTI를 화제로 이야기할 때 J인지 P인지 물어본다면 떨떠름하게 J라고 대답하곤 하는데, 나는 스스로 계획형 인간이라곤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런 대화를 하면 여행을 갈 때 어떻게 계획을 세우는지를 예시로 들며 이야기하게 되고, 나는 보통 '나는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전날 밤에 다음날 뭐 할지를 정하는 정도'라고 답하곤 한다.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편이고. 그런데 오늘 쓴 이 글을 남들이 보게 되면 '넌 무조건 J야'라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나도 이번 여행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년 7개월 만의 여행이면 설레서 계획 좀 세워볼 수도 있잖아? 다시 자유로운 마음의 여행자로 돌아갈 수 있게 세계가 큰 문제에 빠지지 않고 잘 굴러가 주길 바라면서 마저 짐을 싸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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