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에 한 번씩은 스카이스캐너 앱을 켠다. 돈이 다시 모이려면 적어도 9월은 되야겠고, 추석과 겹치면 직장인들의 여행 시기와 겹쳐서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니까...9월 20일 이후가 좋겠다. 인아웃은 모두 평일로 하는 것이 저렴하고 이걸 별 고민없이 할 수 있는 게 프리랜서의 특권이니까, 목요일인 9월 22일 출발로 일단 선택. 출발은 인천, 도착지는 'Everywhere'로 설정. 짜잔. 대한민국부터 시작해서 저렴한 티켓 가격순으로 세계의 나라가 정렬된다. 머리로 이런저런 고려사항과 한계를 가늠해보면서 나라 하나씩 빼 나간다. '대한민국은 의미가 없고, 베트남은 저번 주에 다녀온 참이고, 일본은 관광비자가 언제 해결될지 모르지... 필리핀은 치안 문제 때문에 관광지가 아니면 갈 마음이 안 생기고, 대만? 후보로 체크. 몽골? 은 나중에 대자연 속으로 가고 싶을때 가고, 싱가포르? 한 번도 안 가봤으니 후보로 체크. 말레이시아? 이 곳도 안 가보긴 했는데 궁금한 게 있었나... 역시 유럽은 말도 안 되는 가격밖에 없구나, 그나마 정상적인 가격은 호주... 아니 근데 직항이 없네!' 결국은 아무런 소득 없이 앱을 종료하고 후보로 떠오른 나라들을 가기 위한 최소 비용을 가늠하고 그것을 모으기 위한 시간을 예측해본다. 일을 더 열심히 받아야 하나? 일이 많이 들어와야 열심히 받지. 매번 비슷한 루틴의 비슷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흘려보내곤 일단 돈 좀 모으고 생각해보자로 결론이 난다. 나는 왜 이것을 반복하고 있을까? 나는 왜 계속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걸까?
가끔 친구들과 여행을 화제로 이야기를 할 일이 있으면 여행을 가는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여행 방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철저히 휴가로서 해외여행을 하고, 누군가는 단 한 번도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누군가는 쇼핑하는 재미로 간다고 하고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게 제일 큰 목표라고 한다. 누군가는 한 국가와 도시에서 오랜 기간 지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누군가는 2~3일 간격으로 다양한 도시와 국가를 이동하면서 여행한다. 돈을 많이 쓰더라도 좋은 숙소에서 쾌적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최소한의 돈을 활용해서 다녀오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나는 대개 혼자 여행하고, 사람을 멀리하며, 소도시를 좋아하고,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쇼핑과 좋은 숙소에는 관심이 없고, 짧은 여행을 자주, 여러 번 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저번 주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 안에서 떠오른 표현인데, 나는 여행지를 마치 미술관에 가듯 방문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타지의 각자 다른 생활 환경에 녹아드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방인이고 여행자이자 관찰자로서 세계를 감상하듯 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여행을 즐기고자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닌데 출장으로 처음 해외 땅을 밟았던 2015년 (아마도)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다니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기꺼이 그럴 예정이다.
하지만 한국의 일상에서 이렇게나 자주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즐기느냐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여행이 가고 싶어질 때 내 마음속에서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다'는 열망은 생각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큰 욕망은 한국에서의 삶을 한 번 일시 정지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깝다. 수많은 사회적 역학관계로 얽혀있는 한국에서의 내 자신으로 살기를 멈춰내고 그저 익명의 여행자라는 임시 신분증으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느냐는 자아탐구는 필연적으로 지루한 신세 한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잠시 건너뛰자. 이 일시 정지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임시 신분증을 부여받아 성실한 세상-관찰자의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는 것.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두 번째는 바로 여행이 끝났을 때 임시 신분증을 반납하고 내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곳에 잘 돌아오는 것이다.
'도망가자'라는 곡은 뮤지션 선우정아의 곡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이 노래가 듣고 싶어지는 기분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이 노래가 필요해질 때가 종종 있다. 다른 곡들보다 이 노래를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가사다. 이 곡의 화자는 이 노래를 듣는 이에게 내내 제목처럼 '도망가자'고 말하는데, 2절까지 반복되던 이 문장은 결국엔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라는 가사로 바뀐다. 적어도 나에겐 이 노래는 '도망갔다 다시 씩씩하게 이곳에 돌아오자'는 말을 마침내 듣기 위한 4분간의 여정인 것이다. 아무래도 도망쳤다 다시 되돌아올 뿐인 이 짧은 여정을 마친다고 내가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마법 같은 일인 것이고, 다만 바라건대 그저 조금 씩씩해질 수 있다면 그 뿐. 이 '도망가자'라는 노래에서 말하는 그 작은 씩씩함이 내가 짧은 여행에서 얻길 바라는 무언가가 아닐까?
여행지에서 작고 다양한 일을 겪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거의 동일한 사람이다. 여행지에서 어떤 결심을 하거나 인생 계획을 세워본 경험도 있지만 대개 한국으로 돌아오면 며칠 만에 다시 흐물흐물한 의지가 되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작은 티끌만 한 것이라도 챙겨 돌아오는 것이 있다면 '일상의 일시 정지'에서 얻는 작은 씩씩함이고, 이 사소한 변화가 종종 답답한 일상을 돌파하는 힘이 되어준다.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그냥 삶을 살면서 믿을 뿐인 문장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작은 경험과 작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서 미래의 내 모습을 만들어 간다는 것. 이 생각이 희망을 주기도 하고 때론 절망을 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희망의 비율이 높다. 더 많은 곳에서 씩씩하게 돌아오는 경험들이 쌓여서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 희망이다. 내 인생이 어떤 장르의 영화가 될지 삶이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을 테지만 (물론 영화가 아닐 수도 있지...) 어떤 장르가 되었든 그 작품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 중요한 자리에 어떤 여행은 기록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며, 오늘도 스카이스캐너를 켰다 끄기를 반복하는 데 소박한 의미부여를 해본다.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0) | 2022.07.28 |
---|---|
세상이 흐릿해도 왠지 안경은 보여 (0) | 2022.07.15 |
여행을 업데이트하기 (0) | 2022.06.27 |
새 줄기를 뻗듯이 (0) | 2022.06.22 |
아마추어의 처방전 (0) | 202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