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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흐릿해도 왠지 안경은 보여

by 서곡 2022. 7. 15.

느지막히 잠에서 깨서 안경을 항상 두는 자리에 손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제 침대에 쓰러지기 전의 나는 어디다 안경을 뒀을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없다. 흐린 눈으로 방을 바라본다. 시선이 뿌연 물건들을 지나 냉장고 냉동실 도어 위에 살짝 튀어나온 검은색 덩어리를 발견한다. 저기다 뒀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자리에서 일어나서 냉장고 위로 손을 뻗어 물체를 잡는다. 역시나 안경이다. 선명한 시야를 되찾은 후 아침으로 먹을 시리얼과 그릇을 챙기다가 문득 신기하다. 어떻게 그 뿌연 형체를 보고 안경인지 바로 알았지? 안경잡이로 25년을 살다 보면 흐린 시야에서도 안경은 보인다. 시리얼을 힘없이 떠먹으면서 안경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흐린 시야에도 잘 보이는 사람이라면 꽤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안경 같은 사람은 대체 무엇일까. 별 용도 없이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지만 오늘 급히 해야 할 일도 없으니 계속 시리얼을 우물거리면서 생각을 이어가 본다. 흐린 시야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흐린 시야에서 마찬가지로 흐릿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 알아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꽤 멋진 표현인 것 같네. 핸드폰을 켜고 글감 목록 (언제부턴가 적기 시작한) 마지막에 한 문장을 추가한다. '세상이 흐릿해도 왠지 안경은 보여.' 이 문장을 제목으로 멋진 작가가 단편 소설 같은 것을 써준다면 꽤 서정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멋진 작가가 아니니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채운다. 

 

시리얼 그릇을 개수대에 대충 넣고 남은 시리얼이 굳지 않게 물을 흘려 채워놓는다. 표면에 굳은 시리얼은 생각보다 잘 안 떨어지더라고. 잘 때 입었던 옷을 대충 벗어 빨래통에 넣고 샤워를 시작한다. 물 온도를 조절하면서 안경을 벗어 물이 제일 닿지 않는 각도의 변기 물통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뜨거운 물을 맞다가 아까완 다른 각도의 삐딱한 생각을 떠올린다. 아무리 그럴듯한 표현이어도 사람이 도구처럼 되려 하면 안 되지. 세상이 흐릿해도 잘 보이는 안경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잘 보이는 사람이 되자. 딴생각을 열심히 하면서도 착실하게 샤워의 모든 단계를 마치고 화장실 밖으로 나와 옷을 입었다. 잘 보이는 사람이 뭔데?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아 그런데 세탁기 예약을 걸어놓는 걸 깜빡했구나, 내일은 꼭 돌려야지. 날씨가 습한 까닭에 샤워를 하고 나왔지만 금세 피부에 닿는 옷이 눅눅해진다. 아... 굳이 도구가 되어야 한다면 에어컨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안되면 제습기라도. 

 

'...여름이었다.' (-는 문장으로 괜히 끝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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