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집 한켠에는 유이 주니어가 살고 있다. 유이 주니어는 벌써 들인 지 4년이 된 작업실의 유일한 반려 식물 '유이'가 무럭무럭 자라 분갈이하면서 따로 떼어내 다른 화분에 옮겨심은 녀석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분리된 그 상태에서 작은 잎사귀 몇 개 정도를 만들며 조용히 겨울을 보낸 녀석이, 날씨가 따뜻해진 한두 달 전부터 갑작스레 완전히 새로운 줄기를 틔우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원래의 줄기보다 더 긴 포물선을 그리는 줄기를 만들고 있고, 계속해서 자라나는 중이다. 창문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팔을 뻗어버린 탓에 안 그래도 좁은 원룸에서 유이 옆을 지나갈 때 머리를 옆으로 피해서 지나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직사광선이 잘 들지도 않는 집인데 선인장의 일종이라면서 왜 한결 더 그늘진 곳으로 뻗어나가려고 하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아니 일단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면 그런 의문보다는 '적당히 해라'라고 쏘아붙여 얼마 남지 않은 내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켜내고 싶은 심정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유이 주니어의 줄기를 살펴보면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를 발견했다. 본인 나름의 선택과 집중이었는지, 원래 있던 줄기에서 갈색으로 변하는 이파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끝부터 타들어 가지 않고 이파리의 시작점부터 끝까지가 균일하게 갈색으로 바뀌는 방식으로. 이건 명백하게 갈색으로 변하는 이 지점부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단호한 의지다. 처음에는 두세 개에서 시작했다가, 일주일에 하나 정도씩 계속해서 이파리를 탈락시켜가면서, 그 영양분을 새로운 줄기 쪽으로 쏟아붓고 있는 모양이다. 새 줄기에는 벌써 큰 이파리가 여럿 달렸고, 줄기의 아직 잎이 자라지 않은 마디마디 끄트머리엔 투명한 액체가 빛나고 있다. 아직 계획한 대로의 규모까진 한참 더 성장할여지가 남은 모양이다. 잘 돌봐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인 걸 보면 대견하면서도 진심으로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집이 좁다.
유이 주니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태를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고 있으면, 무언가를 새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적어도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는, 새로 짓는다는 행위는 대개 오래된 것을 없앤다는 행위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항상 부수고 짓는다. 오래된 집들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는다. 불광천의 자연을 뒤로 하고 상권개발을 통해 '제2의 청계천'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이 선거철마다 차고 넘친다. 유행이 지난 상품을 취급하는 매장들은 사라지는 게 당연시되고 그 자리는 새로운 유행을 잡아탄 매장이 생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맥락을 잘라내고 '완전히 새로운 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더 그럴듯한 세상'을 위한 당연한 욕망이라고 나 자신도 은연중에 생각하기에 부정할 순 없는 내가 사는 세계의 방식들. 우리는 새 줄기를 뻗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자 원래의 줄기를 단칼에 잘라버린다.
이파리 몇 개가 말라 죽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단하게 유지되고 있는 유이 주니어의 헌 줄기를 바라본다. 작년에 독립하기 전까지 25년간 살았던 본가의 아파트는 이제 단지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 학창 시절 다녔던 가게들 중 작은 추억이라도 남아있는 가게는 이제 전혀 찾을 수 없다. 대학 시절을 8년이나 보냈던 홍대를 다시 갈 때마다 아직 망하지 않은 가게를 찾아보는 게 나의 루틴이었는데 이젠 그럴만한 가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막걸리 아저씨를 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괜히 슬픈 기분이 된다. 첫 작업실인 '문화수도'가 있던 건물은 이미 헐리고 아파트 공사를 위한 펜스가 설치되어있다. 특별한 사례를 더 찾을 것도 없이, 내가 지금까지 발 디뎌온 공간과 앞으로 당분간 디딜 공간은 사실 모두 잠시 빌린 공간일 뿐이고, 내가 떠나가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당연한 곳들뿐이다. 내가 내 줄기에 싹을 틔우려 발버둥 치다 지쳐 잠시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뒤에는 뭐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그곳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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