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by 서곡 2022. 7. 28.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점점 무뎌진다. 요즘 들어 어떤 것을 감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흔히 어떤 감각을 발전시키는 것을 '갈고 닦는다'고 표현하는데, 어째 좋아하는 마음은 갈고 닦는다고 생각할수록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갈려 무뎌지고 뻣뻣해지는 것 같다. 실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영화를 본 후에 이 영화 정말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이 영화에 영화를 주거나 반대로 이 영화가 영향을 주었을 다른 영화들을 생각한다. 어떤 장면은 좋았고, 어떤 장면은 진부하다. 평범할 수 있는 시나리오에 작은 변주를 주어서 지루하지 않게 만든 점이 탁월했다.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깨닫고 마는 것이다. 어? 근데 내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것이 맞나? 그냥 분석하고 있을 뿐이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빈도가 점점 늘어간다.

처음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을 봤을 때가 생각난다.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모든 장면에 홀려서 봤던 그 기억. 평소에 영화를 절대 여러 번 보지 않는 내가 굳이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번 더 볼 수밖에 없었던 강렬한 기억. 학창 시절 내내 차트 가요와 에미넴 정도만 듣다가 '롤러코스터'라는 밴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그런 기분. '일렉트로닉 음악 = 시부야 케이 음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 'Justice'를 듣게 되었을 때의 기분 같은 것 말이다. 한참 동안 콘솔게임에서 멀어져 있다가 PS4를 사서 처음으로 플레이했던 '라스트 오브 어스'와 '블러드본'에서 얻은 충격적인 경험 같은 것들.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머물러야 했던 스위스 취리히의 풍경을 보면서 받았던 매일의 감탄과 깨달음들.

정말 좋아해서 자주 했을 뿐인데, 좋아하는 장르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 장르에서 느낄수 있는 행복의 최대수치와 빈도가 낮아지게 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만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무뎌지고 뻣뻣해지고 두꺼워지고 촘촘해진 내 '감각적 껍질'의 얼마 남지 않은 틈새를 정확히 찔러줄 무언가를 찾아서 열심히 돌아다녀야만 한다. 대개는 껍질을 뚫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그저 그런 무언가로 기억되지만, 일 년에 몇 번쯤 그 틈새를 파고들어 와주는 경험을 만날 때 그제서야 '아 이러려고 이걸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다. 고작 30년 조금 넘게 살아온 주제에 이런 소리를 하다니 좀 건방진 것 같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시간 동안 점점 더 이 껍질이 견고해질 것을 상상해보면, 벌써부터 앞으로의 일이 아득해진다. 전 세계의 모든 창작자, 모든 여행지, 모든 감각의 선구자들에게 '절 위해 분발해주세요!' 응원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게 생기는 나의 슬픔이 크면 클수록, 꾸준히 자신만의 좋은 것을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찔러주는' 창작자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더 성공하고, 더 잘 벌고, 더 인정 받아서 (하지만 또 초심은 변치말고) 더 많은 창작물을 세상에 남겨줬으면 좋겠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오랫동안 더 협업했으면 좋겠고, 린 마누엘 미란다는 계속 뮤지컬을 만들어줬으면 좋겠고, 노아 바움백 감독이나 크리스토퍼 놀란도... (이하 생략) 한때는 나도 그런 사람들이 되려고 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의지가 흐물흐물해진 상태다. 아마도 이게 초심이 변했다는 거겠지.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현재는 아직 남들에게 가 닿고 싶은 '찔러주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이걸 내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고. 그 말이 떠오를 때까진 다른 사람들의 뾰족한 감각이 나를 정확히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이 세상을 떠도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을 품평하는 능력  (0) 2022.08.05
리듬을 그리는 손짓  (0) 2022.07.30
세상이 흐릿해도 왠지 안경은 보여  (0) 2022.07.15
'돌아오자 씩씩하게'  (0) 2022.07.13
여행을 업데이트하기  (0) 202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