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유롭게 살고 말리라. 하루종일 아무런 스케줄 예약도 없는 첫 하루였다.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는지, 호텔 조식을 먹고 돌아와서는 침대에 다시 누웠는데, 점심까지 나른해져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정신 차리고 점심식사를 하기로 결정한 'Cuc Gach Dakao'에 도착한 것은 거의 한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 곳은 내 구글맵에서는 'Cuc Gach Cafe'로 저장이 되어있던 곳이고, 몇 년 전 호치민 방문 때 와서 가정식 상차림을 한번 맛봤던 곳이다. 그때 나왔던 가정식의 구성 (밥, 국, 생선요리 등등)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왔던 곳인데 와보니 입장 전부터 상호가 살짝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부로 들어와 보니 지난번 여행의 경험과 구글 리뷰와는 다르게, 세트구성이 없고 그대신 아주 두꺼운 메뉴판에 빼곡히 적혀있는 디테일한 음식들을 개별적으로 고르게 되어있었다.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지만 점원에게 추천하는 음식을 물어봤을 때 세트 구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말을 해주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던 것을 봐서는 메뉴가 바뀐 듯. 어쨌든 점원의 추천과 나의 감으로 메뉴 세개를 시켰다. 고기가 들어간 쌀국수 요리와 (아마도 그저께 음식 투어에서 맛본 분팃느엉과 비슷한 계열) 레몬그라스와 조리한 두부 요리. 그리고 입가심을 위한 포멜로 주스.
쌀국수 요리는 분팃느엉처럼 소스를 부어 비벼 먹는 형태였고, 아무래도 가격대가 조금 있는 식당이다 보니 음식 투어의 그것보다는 풍부한 풍미가 느껴졌다. 재료 탓인지 살짝 잡채의 느낌도. 레몬그라스와 조리한 두부요리는 식감이 생각보다 부드러웠는데, 살짝 단단하게 익은 겉면을 씹으면 흐물한 안쪽의 두부 식감이 재밌었다. 레몬그라스와 조리했다고 하긴 하는데 소스 맛이 강하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쌀국수와 같이 나온 소스에 같이 찍어 먹었다. 포멜로 주스는 생과일 주스 같았는데 정말 간 상태 그대로의 주스와 단맛을 첨가할 수 있는 시럽이 따로 나와서 건강해 보이고 믿음직스러웠다. 먹다 보니 음료를 제외한 두 가지의 요리가 맛이 있긴 했지만 기존에 먹었던 베트남 요리의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호기심에 새로운 메뉴를 하나 시켜보기로 했다. 두꺼운 메뉴를 다시 펼쳐서 고른 것은 'Loc'이라는 생선을 진흙냄비로 익힌 요리였다. 앞서 주문한 요리를 다 먹을 때 쯤 나온 생선 요리는 장조림 같은 색깔의 비주얼이었는데, 돼지고기가 같이 들었고 짭조름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는 점에서 한식 조림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중식 조림이 생각나기도 했다. 궁금함에 시킨 것이기 때문에 이미 쌀국수와 두부로 배가 가득 차서 생선요리는 60%만 먹을 수 있었다. 좀 짰기 때문에 밥까지 추가해버려서 더더욱 한계였다. 후회 반 만족 반으로 생선요리를 조금 남기고 계산을 했다. 애초에 가격이 조금 있는 곳이었던 데다가 요리를 세 개나 시켜서, 여행이 끝나고 돈 쓴 내역을 보니 어제의 파인다이닝을 제외하면 제일 비싼 돈을 쓴 식당이 되었다. 베트남인데 한 끼에 26,000원 정도를 썼으니.
식당을 나서면서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려다가, 약국에 들러서 약을 사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에 피곤하면 종종 편도 쪽이 살짝 붓는 편인데, 대개는 더 아파지지 않고 그냥 불편함만 주다가 며칠 후에 사그라들기에 딱히 약을 먹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이 여행지이기도 하고, 짧은 여행인데 약간의 불편함을 가지고 다니기는 싫어서 약을 먹어보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베트남은 한국처럼 의약분업이 시행되고 있지는 않은지, 약국에서 웬만한 약을 다 처방받을 수 있다고 했다. 로컬 약국으로 바로 들어가긴 좀 그래서 'Pharmacity'라는 프랜차이즈 약국을 검색해 찾아갔다. '편도가 아픕니다.'라는 문장을 번역기로 번역해 보여주면서, 목 쪽을 손으로 쓰다듬는 제스쳐를 통해 상황을 설명했다. 약사는 '2days?'라고 되묻고는 서랍에서 약상자들을 꺼내 몇 종류를 소분해 담았다. 비타민 C도 주려고 하길래, 비타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게 있다고 거절. 작은 지퍼백에 담아주는 약값은 17,600동이니 한화로 천원이 좀 안됐다. 이렇게 약국에서 약을 처방해주는 게 한국 사람 입장에서 선진 시스템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여행자의 간단한 약 구매에는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소 잔병치레가 잘 없는 탓에 여행지에서 약을 사서 먹어본 경험이 처음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뭐 하나 해봤네- 싶었다.
약국에서 나온 후에는 또 천천히 사진을 찍으면서 걸었다. 목적지는 어제 풀 부킹으로 거절당했던 'Sa Spa'. 오늘은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예약을 하러 갔다. 물론 전화로 예약을 하거나 이 정도 수준의 마사지 샵이면 SNS 예약도 가능할 테지만 걸어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명분을 만드는 목적지이기도 하니까, 고민 없이 걸어갔다. 어제 왔던 길이어서 일부러 약간 옆길로 빠져서 돌아다녔다. 'Turtle Lake'라는 로터리 가운데에 있는 묘하게 생긴 공원도 발견해서 잠시 구조물 위에 올라갔다 왔다. 거북이가 사는 것은 아니고 거북이 형태의 구조물이 있어서 거북이 호수인 듯 했다. 이윽고 도착한 'Sa Spa'에서는 호기롭게 3시간짜리 코스를 예약했다. 내일 점심 필라테스 수업을 받고 나온 후 바로 이리로 이동해서 3시간짜리 코스를 받으면 건강한 하루가 완성되지 않을까 싶은 느낌으로.
스파를 나와서는 오전에 잠시 검색해놨던 5군으로 그랩을 타고 이동했다. 5군은 일종의 차이나타운으로, 지금까지 봐왔던 일반적인 베트남 거리와 7군의 한국인 거리와는 좀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서 궁금했던 곳이다. 이곳의 목표 지점은 티엔허우 사원이었지만, 일부러 그 앞으로 바로 가지는 않고 지도상 조금 옆 지점에서 차를 내려서 카메라를 들고 걸어 다녔다. 거리의 모습이 건물 양식 자체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1층의 상점들의 판매 품목과 장식들이 중국풍으로 되어있었다. 대개는 붉은색과 황금색을 활용한 장식들, 그리고 한문이 많이 보였다. 이렇게 해놓으니까 약간 홍콩의 풍경 같기도 한데 홍콩을 실제로 가본 적은 없다. 영화로만 접한 홍콩... 차이나타운은 어느 나라의 것을 방문해도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놓는다는 점이 재밌다. 조금 걷다 보니 티엔허우 사원이 나왔다. 바다의 신을 모시는 사원이라고는 하는데 정보를 많이 찾아보진 않고 그냥 들어갔다. 코로나 때문인지 구글 지도에도 바로 표시될 정도의 장소라면 관광객이 있을 법했는데 한두 명밖에 없었다. 그래선지 더 고즈넉한 느낌이 들고, 조용하게 향냄새가 나는 공간이 보기 즐거웠다. 사원이 크지는 않아서, 잠시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사원을 나와서는 딱히 목적지가 없었다. 그래서 지도를 켠 후, 근처에 보이는 '안동 시장' 방향으로 대충 잡고 걷기 시작했다. 큰길로 나오자 병원인지 학교인지 의료 관련 이미지가 풍기는 큰 건물들이 있었고, 1군 내에서는 보기 힘든 큰 길거리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모험하듯 아무 목적지 없이 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정취와 시각적 해프닝이 있어서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몇십분 되지 않아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시 어느 큰 훠궈집 처마에서 비를 피하며 그랩을 예약하려 했으나 제대로 잡히지가 않았다. 몇 번 더 시도를 해보다가, 비가 살짝 그친 틈을 타서 갈 수 있는데까지 더 가서 그랩을 잡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간 곳은 '호아빈 공원(한국 공원)'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를 기념해서 만든 공원인 것 같은데, 아주 작은 공원에 한국식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데도 운동하는 사람들과 정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이곳에서 그랩을 잡아서 숙소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들어와서는 다시 누워 잠시 쉬었다. 며칠 연속으로 땀을 잔뜩 흘리니 제때제때 쉬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편도도 살짝 부은 상태였으니. 다행히 약을 먹은 탓인지 점점 불편함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어서 마음은 놓였다. 그래도 저녁은 챙겨 먹어야 하기에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궁금했던 것이 하나 떠올랐다. 이전 여행들에서 가끔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가게 되었을 때 그 국가의 특선 메뉴(?) 등을 발견하면 그것을 먹어보는 게 재밌었는데, 베트남에도 그런 메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역시나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밥 메뉴가 있는 것이었다. 역시 이것을 안 먹어볼 수 없지. 시청 앞 대로에 위치한 맥도날드를 확인하곤 그리로 향했다. 하도 주변을 걸어 다녀서 이제 이 정도 위치는 따로 지도를 켜지 않아도 대충 걸어갈 수가 있다. 대로에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고, 맥도날드 1층의 키오스크 주변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혹시 자리가 없을까 했는데, 다행히 2층에 앉을 수 있는 좌석 두어 개가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점이어서 그런지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았다. 베트남에서는 아직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닐 때 제지하는 문화가 있지는 않은지 여기저기 소리를 지르며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결제할 때 가져온 번호를 보고 점원이 메뉴를 가져다주었다. 빅맥 세트와 '밥 도시락' 메뉴. 키오스크의 Taste of Vietnam 섹션에는 마카로니 수프라는 것도 있었으나 더운 상황에서 수프까지 먹기는 싫어서 주문하지 않았다. 대망의 밥을 맛볼 시간. 밥 위에 갈색 소스가 살짝 뿌려져 있었고, 치킨 패티 같은 것이 곁들여 먹을 수 있게 나오는 구성이었다. 생 오이 슬라이스도 같이. 결과적으로는 익숙하고 맛있는 맛이었다. 이미 뿌려져 있기도 하고 추가로 제공되는 스위트갈릭(?) 소스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그 맛이었고, 치킨 패티 또한 맥너겟을 얇게 펴고 후추를 살짝 뿌린 맛 정도로 익숙한 맛이라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빅맥은 아무래도 재료 탓인지 한국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났지만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고 말하기 힘들 수준 정도의 차이였다. 버거킹도 검색해볼 걸 그랬나, 그래도 두 끼나 패스트푸드로 해결하는 건 좀 그렇지. 오늘은 더 도시를 돌아다닐 에너지가 없었기에, 숙소로 바로 돌아와서 오늘 업로드된 기묘한 이야기 시즌4 파트2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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