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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8 - 07.04] 베트남 호치민 #03

by 서곡 2022. 7. 4.

어젯밤에 잠들면서 큰 후회를 했다. 오전 8시 반에 일정을 예약해놓다니? 여행지에서 어차피 늦잠을 잘 안 자니까 아침 일찍 예약해도 문제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크게 반성해야 한다. 어제 필라테스의 여파로 전신에 은은한 근육통이 있어서 일어나기 더 힘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비척비척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아침에 진행하는 일정은 어제의 오토바이 푸드 투어와 마찬가지로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한 '기본 베트남어 배우기'. 호스트와의 약속 장소인 93 Yershin 의 콩 카페로 갔다. 어쩌다 보니 콩 카페는 첫 방문인 듯. 호스트인 Mia와 인사하고, 음료 주문을 한 후 창가의 바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공부를 시작했다.  

 

한 시간 반짜리 짧은 수업인 만큼, 예상했던 대로 수업의 범위는 간단했다. 베트남 알파벳의 성조 표기에 따른 읽는 법과, 영문 알파벳과는 조금 다른 모음 종류에 따라 발음하는 법을 배우고, 간단한 베트남 표현을 익히는 정도였다. 어릴 때 중국어를 배워보지 않아서 성조가 있는 언어를 처음 배워보는 게 흥미로웠다. (맛보기지만..) 간단한 인사나, 주문할 때 설탕을 빼는 법, 계산해달라고 하는 표현 등등을 배웠는데 따라서 배우면서도 아마 거의 기억 못할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이후에 Em ơi와 Tính tiền이라는 표현은 곧잘 써먹게 됐으니 충분히 얻은 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시간 정도 수업을 진행한 후, Mia와 가고 싶은 여행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다가 스위스로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너무 비싸다며... 나는 비싸도 인생에 한 번쯤은 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거듭 추천해주고 카페를 나왔다. 아 스위스 다시 가고 싶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레스토랑 'Propaganda'에 들러서 고이 꾸온을 시켰다. 이 레스토랑은 저번 여행 때 구글맵에 표시해두고 막상 방문은 안했던 곳인데, 4년이 지나도 여전히 무사히 영업 중이었다.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 곳이라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듯했다. 음식을 한 종류만 주문했지만 플레이팅에도 신경을 쓰는 듯. 물론 그런 만큼 일반 로컬 가격보다는 비싸다. 맛 자체 에서 놀라움은 역시 없었다. 고이 꾸온 하나 시켜놓고 평가하기는 좀 그렇지만은... 브런치 느낌으로 적당히 먹고 일어나서 숙소로 복귀하고 침대에 누워 내리 세 시간을 잤다.

 

잠에서 깬 이후에도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서 예약된 저녁 파인다이닝 일정 전에 마사지를 받으면 어떨까 하고 주변을 검색해봤다. 괜히 한국인 후기들이 가득한 곳은 싫어서 외국인들의 후기가 좋은 곳인 'Aman Spa & Wellness'를 목표로 삼고 숙소를 나와 걸었다. 하지만 역시 인기가 많은 곳답게 풀 부킹이라 그냥 들어간 나는 돌아 나와야 했다. 옵션으로 갈 곳을 찾아두진 않아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저녁에 갈 레스토랑 근처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갑작스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치민에서 맞는 첫 번째 비. 동남아 날씨답게 순간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문제는 계획상 마사지를 받은 이후 잠시 카페에서 숨돌릴 겸 글을 써볼까 했던 탓에 내 에코백에는 맥북과 카메라가 들어있었다는 것이 문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당황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는 않으니까 잠시 베트남 CJ 건물 처마에서 비를 피하면서 해결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 첫 번째 시도는 맞은편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우산을 사는 것. 빠르게 편의점으로 들어갔으나 어느 정도 예상 한대로 우비 위주로 구비되어 있었고, 우산이 있긴 했으나 아주 작은 접이식 우산, 게다가 핑크색 한 종류였다. 이미 숙소에 단우산이 있는데 마음에 들지도 않는 우산을 또 사기는 싫어서 다시 잠시 고민. 내 기억으로 동남아의 비는 오랜 기간 내리기보다는 단기간에 많이 내리고 다시 싹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일단 저녁 레스토랑 위치 근처의 카페를 찾아 그곳을 목적지로 그랩을 불러 타고 가자. 카페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다 보면 비가 그칠지도 모른다. 다행히 두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레스토랑 근처의 'Guta Cafe'(체인점인 듯)로 황급히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 글을 쓰자 곧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예약시간까지는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으니 이제 다시 발품을 팔아 괜찮은 마사지 센터를 찾아야 할 때다. 

 

출발 전에 같은 블럭 안의 후기가 어느 정도 올라온 업체를 두 곳 골라놓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또 변수가 생겼는데, 두 곳 모두 구글맵의 위치에 가니까 다른 업종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최근 몇 달간의 후기가 올라온 것을 확인한 게 아니면 안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또 얻었다. 레스토랑이 있는 그 구역을 천천히 둘러봤으나, spa라는 이름을 달고 네일 관리 등을 하는 샵들만 있을 뿐 내가 갈만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행 전에 찾아놓은 고급스러운 스파가 있었는데 거리를 확인하니 걸어서 20분. 도시를 탐험하는 느낌으로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맥북을 들고 있어 어깨가 다소 무겁기는 했지만 그래도 습관대로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걸으면서 찾아가다 보니 목적지 'Sa Spa'로 도착하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중간에 'Công viên Lê Văn Tám'이라는 공원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데도 그것을 맞으며 놀거나 운동하는 사람들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 보람 있는 30분이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Sa Spa'도 풀 부킹 상태였다. 이것이 계획 없이 대충 움직이는 사람의 말로구나... 하지만 이미 마사지를 받기로 한 것 어디로 가든 받기는 받아야겠다 싶어서, '호치민', '마사지' 키워드를 검색하면 제일 유명하게 올라오는 'Miu Miu Spa'로 바로 그랩을 불러 이동했다. 이 말인즉슨 열심히 이동했지만 결국 호텔 근처로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 또 너무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다행히 지점이 여러 개인 유명한 곳답게 이곳에서는 도착해서 바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무계획 모험이 여러 번 실패한 탓에 저녁 예약 시간이 타이트해 한시간 코스로. 적당히 괜찮은 마사지를 받은 후 숨 돌릴 틈 없이 다시 레스토랑 쪽으로 이동했다.

 

Esta의 화로를 이용해 요리를 하는 모습

아슬아슬했지만 정확한 시간에 'Restaurant Esta'에 도착했다. 레스토랑은 예상 외로 다소 한산한 모양새였다. 혼자 온 손님은 바 형태 자리만 예약할 수 있어서 나는 그쪽으로 안내받았고, 더 안쪽의 룸 자리는 시끄러운 걸 보니 단체 손님이 와있는 모양. 하지만 그 밖에 손님은 두세 팀 정도로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오히려 좋아. 차분하게 코스요리를 즐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호치민에서 한 끼 정도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도전해보고자 결정했을 때 이곳을 결정한 이유는 호텔에서 아주 멀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아시안 요리를 내놓는다는 점이었다. 생각보다 베트남 음식스타일만으로 파인다이닝을 진행하는 레스토랑은 많지 않았고, 대개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프랑스 식민지였고 식문화에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레스토랑 여러 곳을 다녔다면 프랑스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었겠지만... 단 한번이라면 역시 아시아 음식을 내놓는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다. 자리에 앉고 풀코스 디너로 주문하고 잠시 앉아 기다리자, 수셰프가 나와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고 (이름은 까먹었다. 죄송...), 자신은 일본과 한국에서 영감을 받은 휴전 아시안 요리를 내놓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요리를 눈앞에 보이는 화로를 가지고 요리를 한다고도. 확실히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 화로가 있어서 요리와 요리 사이 애매하게 뜨는 시간 동안 멍하니 구경할 것이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조금 덥긴 했지만)

 

요리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기록하기 위해 맛을 적당히 적으면서 식사하긴 했으나 여기에 장황하게 설명하기는 정리도 안 되어 무리가 있고, 제일 인상적인 것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몽족 스타일의 송아지 지라/흉선 요리(H'Mong style veal sweetbread)', '7일 건조 청둥오리와 루바브 무함마라(7-days-air-dried mallard, rhubarb muhammra'가 맛이 대단했고 조금은 다른 의미로 '객주리(쥐치?)와 절인 토마토 콩 요리(Unicorn leatherjacket fish, Tomato douchi)'가 인상적이었다. 송아지 지라/흉선 요리는 꼬치형태로 구워진 상태에서 구워진 사과가 같이 꽂혀 서빙되었는데, 씹는 식감을 주기 위한 깨와, 베트남의 터치를 주는 소스(아마도 고수와 향채가 들어갔을)와 같이 먹으니 부드러우면서 깨가 씹히는 식감이 즐거웠고 당연히 맛도 좋았다. 청둥오리 요리도 마찬가지로 화로에 잘 구워져 서빙되었는데, 고기도 고긴데, 처음먹어보는 무함마라의 맛이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상큼하고 좋았다. 오리의 기름질 수 있는 부분을 새콤고소한 무함마라가 잡아주는 기분. 루바브라는 재료가 이런 맛이라는 것을 이번 식사하면서 처음 알았다.

 

객주리 요리는 맛이 있었던 것과 별개로 인상적인 포인트가 따로 있었는데, 이 요리의 재료인 Unicorn leather jacketfish와 Tamato douchi 모두 생소한 재료였기 때문에 맛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플레이팅 된 상태도 꽤 아름답게 두 가지 소스가 레이어된 상태로 나와서 무슨맛 일까 기대하며 생선 살에 소스를 묻혀 입에 넣었는데, 그 맛의 카테고리가 한국 생선 조림 비슷한 맛이 느껴져서 너무 충격적이고 재밌었다. 수셰프가 처음에 설명했던 '한국에서 영감을 받은' 부분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이건 정말로 고급스러운 고등어조림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재밌었다. 일반적인 한국의 조림 양념보다는 새콤함이 가미되어 느끼함이 없는 느낌? Tamato douchi라는 재료에서 새콤함이 나오는 것 같다. 이 세 가지 요리 말고도 눈과 입이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풀 코스 디너였다. 복숭아와 루바브를 곁들인 겐마이차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먹고 식사가 끝났다. 결제할 때 예상했던 가격보다 살짝 더 나와서 현금이 부족해 2초간 아찔했지만, 고급 레스토랑 답게 카드 결제에 전혀 문제가 없어 해외 결제용 마스터카드로 문제 해결. 가격이 올라간 이유는 내가 주문한 페리에와 서비스 차지가 추가되어 그랬던 것이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선 욕조에서 반신욕을 한번 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블로그에 공항갈 때 들었던 음악에 대한 짧은 생각을 글로 써서 업로드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로써 아침저녁으로 계속 예약이 잡혀있는 날도 끝이니, 내일부터는 여유롭게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피곤하다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