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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와 파인애플

by 서곡 2022. 5. 24.

꽤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선언으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나는 건포도가 들어간 모카빵을 좋아한다! 한 가지 더. 나는 파인애플이 들어간 하와이안 피자와 하와이안 버거를 좋아한다! 농담이 아니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와 야유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탄수화물과 치즈와 고기 등이 선사하는 텁텁함과 느끼함 사이에 터지는 새콤함을 사랑한다. 심지어 전통의 고깃집 반찬으로 등장하는 과일 사라다 (절대 샐러드가 아니다.)속에 들어간 건포도까지 차별하지 않고 골라 먹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마요네즈의 미끌거림을 상쇄해주는 건포도의 새콤함을 사랑한다. 이미 사라다 속의 사과로도 새콤함이 충분한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지만... 

 

건포도와 파인애플을 좋아한다고 하면 짐작할 수 있듯, 나는 신맛 자체를 꽤 좋아한다. 한식에서의 새콤달콤한 비빔장들이 들어간 모든 면 요리를 좋아하고, 신김치로 만든 음식들도 좋고, 새콤하게 무친 초무침들도 좋아한다. 한국을 벗어나면 역시 좋아하는 것은 태국 음식을 비롯한 동남아 요리. 레몬그라스와 라임즙들이 들어간 요리들을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못 간 지 2년이 지난 지금, 일본 다음으로 태국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팔 할쯤 된다. 그런데 취향이라는 것이 꽤 재밌는 것이, 단 한 가지 분야에서는 신맛을 싫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커피다. 산미가 좋은 커피를 즐기는 것이 커피의 맛을 잘 아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커피의 산미는 맛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를 수 있다면 항상 산미가 적은 원두를 골라 마시는 편이다. 특히나 차갑거나 따뜻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에서 올라오는 신맛은 견디기가 힘들어 잘 안 먹게 될 정도. 

 

한 달 전 친구들과 대구 여행을 가서 '블랙 로드'라는 커피 전문점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흔히 마시는 맛과 향의 커피 말고, 세계 각지의 농장에서 공수한 다양한 스페셜티 커피를 방문한 사람의 취향에 맞게 추천해주는 곳이었다. 원두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들은 후 주문했던 첫 잔은 포도 향이 난다고 하는 원두로 내린 커피였다. 역시나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가 목을 타고 넘어가고, 이어지는 뒷맛으로 포도 향이 실제로 나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맛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마시는 게 재밌다라고는 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각자의 커피 취향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이렇게 커피 이외의 향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추구할 수도 있겠구나 어렴풋이 생각하게 했다. 취향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에서 조금씩 벗어난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다음으로 맛 보게 된 두 번째 커피의 맛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취향 추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두 번째 커피는 첫 번째 커피와 마찬가지로 포도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된 원두였는데, 그 포도 향이라는 것이 첫 번째 커피의 목 넘김 이후에 느껴지는 잔잔한 포도의 맛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었다. 커피를 마시자마자 입에 먼저 포도 맛이 강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커피 맛이 뒤에 따라오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마신 후에 내가 친구에게 말했던 첫 감상이 '이거 거의 웰치스네?' 였으니 그 포도 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 정도의 포도 향이면 커피라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 아닐까...? 하지만 커피 원두로 내린 음료니까 커피기는 하지, 그렇기는 한데... 커피를 좋아해서 다양한 원두를 찾아 마시는 사람이 이 맛을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어떤 분야든 취향을 더 깊게, 더 다양하게 탐구하는 사람들의 영역은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를 꺼낸 건포도와 파인애플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는 애매한 마이너 취향 정도로는 웰치스 향이 느껴지는 커피를 좋아하는 정도의 취향 탐구 수준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건포도와 파인애플 취향이 더 탐구할 수 있는 취향의 영역에 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사소한 취향만으로도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사소한 취향이기에 적당히 서로 웃으며 스몰톡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만, 단호히 어떤 취향의 존재 가치를 무시해버리는 곤혹스러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렇게 웃으며 넘어가기도 쉽지가 않다. 건포도와 파인애플 이야기에 정색하는 사람이라면, 웰치스 향 커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영화 이야기는 꺼낼 수 없는 사람, 어떤 장르의 음악 이야기는 나눌 수 없는 사람, 어떤 것이든 가성비로만 판단하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이 참 두렵다. 그리고 동시에 내 자신이 언젠가 나도 모르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봐 두렵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지켜볼 때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구나 매번 생각하게 되는 요즘의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 세상이 나아갔으면 하는 명확한 방향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 넓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느리지만 동시에 빠르게 실제로 그렇게 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과, 그 취향의 대상에 대한 건강한 호기심을 꾸준히 연습하지 않으면 '어?'하는 사이에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 싶은 순간이 올 때, 큰 걱정 없이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대화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그러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할까? 포도 향 커피 한 잔을 떠올리다가 생각이 길어졌다. 

 

*물론 실제로 건포도와 파인애플 취향에 정색하며 진심으로 역정을 내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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