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따금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질문 의도는 아무래도 직업의 방향성으로서 어떤 사람처럼 일하길 바라느냐에 가까운 질문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한참을 얼버무리다가 결국엔 없다고 대답하고야 만다. 어렸을 때는 이런 작가 저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서는 그 누구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과거의 롤 모델들을 가만히 떠올려 볼까. 성범죄 혐의로 롤모델에서 탈락한 사진작가, 멋지게 자수성가한 줄 알았는데 그저 집안의 돈을 탕진하고 있었을 뿐인 어떤 선배, 수업에서는 멋진 정신을 가르치지만 자기 업무에서 학생들을 무급 착취하던 교수, 멋진 작업을 계속 진행해온 원동력이 업계 표준 페이에 한참 못 미치는 돈으로 작업을 해주는 것 때문이었던 어떤 디자이너, 대개는 친절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지독히도 괴롭힌다던 어떤 선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버린 업계에 몇 년 몸을 담더니 그 자신 또한 돌아버린 사람이 되어버린 누군가... 생각을 그만두자. 왜 유독 사진하는 사람들 중에는 돌아버린 성범죄자가 많은지? ...이 생각도 그만두자.
아직도 삶에서 아는 것이 없는 아이인 것만 같은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꽤 자주 한다. (나이가 몇인데 넌 이미 어른이라는 반박은 애써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일까. 어떤 모습으로 나이들면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교과서의 전통 설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삶의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선 이런 이상적인 어른을 '으른'이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으--른'에 가까운데, 입으로 내뱉으면 왠지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나지만 왠지 계속 그렇게 부르고 싶다. 삶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으른은 과연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으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슬프게도 나의 삶에 최적화된 으른의 목표 조건은 참 까다롭다.
나는 프리랜서 사진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일단 프리랜서라는 카테고리가 앞에 붙는 순간 '각자도생'이라는 사자성어가 같이 따라붙는 것만 같다. 거기에 사진가라는 단어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외로운 대지에 홀로 서서, 또는 어두운 암실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해야 어떤 것이든 성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덧붙여서, 나는 정통 사진학과를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학교의 어떤 인맥으로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료 및 선후배를 만나기가 극히 힘들다는 소리다. 여기까지만 해도 전 국민 으른 후보의 95%는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디테일이 하나 더 있다. 특정 분야의 사진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 예컨대 패션 포토그래퍼, 제품 포토그래퍼, 행사 포토그래퍼 등 단어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세부 직군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5% 남아있던 으른 후보들이 '대체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이냐'며 성을 내고 돌아설 것 같다. 여기에 커리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성격, 작업물의 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삶의 태도까지 우러러볼 수 있는 '으른'을 발견하기란? 내 생각에도 불가능에 가깝다. '으른' 소개 에이전시가 있다면 나는 만족시킬 수 없는 클라이언트로서 블랙리스트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 조건이 어려운 게 아니라 이런 조건을 내세우는 내가 문제다. '그냥 아무나 적당히 골라잡고 따라가 봐' 언제나 힘을 못 쓰는 역할의 '까다롭지 않은 나' 자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직업의 방향성으로가 아닌 삶의 태도로서 으른을 찾으면 어떨까? 그것은 더욱더 암담하다. SNS에는 각자의 생활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지만, 대개는 소비하는 것과 '업로드할만한 것'으로 넘쳐날 뿐이다. 물론 그 정보들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삶의 태도를 유추할 수는 있지만... 이 글의 첫 문단에서 나열했다시피 겉보기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다간 정말 해괴한 인간들을 우러러볼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위험이 존재한다. 이쯤 되면 '으른'을 찾는 행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목표로 삼을만한 누군가를 찾는 것이 과연 필요한 행동일까? 당연히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멋진 생각과 정신을 추구하며 실제로 그 추구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뤄낸 사람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믿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존하는 인물로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의 막연한 불안감도 좀 사라질 것만 같다. 아, 문장으로 옮기고 나서야 믿음직한 으른을 찾는 행동의 이유가 확실해졌다. 나의 으른 찾기는 아무래도 나의 막연한 불안감이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