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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다는 감각

by 서곡 2022. 4. 1.

일을 잠시 쉬기 위해 스케줄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몇 가지를 시작했다. 더 나은 정신을 위한 상담, 새로운 카메라로 사진 찍기, 보컬 레슨. 작년 말부터 해오던 필라테스도 마침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고통으로 헤쳐 나가고 있으니 이것도 리스트에 포함할 수 있다면 네 가지나 된다. 계획하고 결정한 것들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체득한 노하우가 제 역할을 발휘한 걸 수도 있겠다. 바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그 행위 자체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것. 어떤 분야든,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그것을 반복하면 점점 나 자신이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즐거운 기분은 막막했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잠시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마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준다. 성장은 대개 재능이나 시간 부족등에 가로막혀 곧잘 멈추기도 하지만, '이것은 취미'라는 변명을 앞세우면 여지없이 다가오는 좌절감을 슬쩍 피해나갈 수 있다. 아직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 상담을 제외하곤 새 카메라, 보컬 레슨, 필라테스 모두 아직까지는 제 역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가져다주고있다. 새 카메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일상을 찍는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 있고, 보컬 레슨은 1년 반의 역류성 식도염이 망쳐놓은 내 성대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필라테스는 아직 조금 남아있는 허리 통증을 완벽히 해결하진 못하고 있지만 조금씩 확실히 나아지는 가동 범위와 동작 수행능력을 느끼는 것만으로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잠시 상담 이야기를 해볼까, 이번 주 상담사는 '오랫동안 어른인 척 연기를 해왔는 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생애 최초로 상담을 진행해오면서 내가 하고 있는 상담이 대체 효과가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아셨어요?'가 아니라 '나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라는 말이 자주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상담의 결과가 대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마 다른 글을 따로 써서 기록 하는 게 좋을 테니 잠시 멈춰두고, '어른인 척 연기를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33살인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상황이 좋은 걸까 슬픈 걸까? 아마도 슬픈 쪽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이미 생각을 안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벌어져 버렸고 어쨌든 나는 이 상황을 수습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성장해 나가야만 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독립적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스르고 주변을 살피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은 대체 무엇일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기꺼이 가르침을 받을 텐데, 역시 둘러봐도 그래줄법한 '좋은 어른'은 보이질 않는다. 

 

방준석 씨의 안타까운 부고를 듣고, 오랜만에 방백의 '너의 손' 앨범을 들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윤하 씨가 쓴 앨범에 대한 글의 첫머리는 이런 문장이다. '이것은 어른의 노래다. 안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른의 노래다.' 이 앨범이 나온 시기가 2015년이니까, 백현진씨가 44살, 방준석씨가 46살 정도 되었을 시기, 그들은 어른의 노래로 다짐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이것이다.

 

"도대체 언제쯤 좀 더 맑은 정신과 
좀 더 깔끔한 기분으로 살까 
술, 담배도 끊고 연애도 끊어보고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 "

 

40대 중반의 그들이 노래한다. 언제 더 맑은 정신과 깔끔한 기분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나름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술, 담배를 끊고 연애를 끊어보는 것이다. 33살의 내가 대체 언제 어떻게 어른이라는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참 가소로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동시에 절망도. 이 질문은 절대 쉽게 끝나지가 않는 것이구나. 하지만 나도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 한다. 새로운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고, 새로운 발성법을 연습하고, 선생님 눈에 영 차지 않는 하체 가동 범위를 더 늘려야 한다. 새로운 책과 영화들을 보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들을 소화해 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잘 쉬고, 잘 일해봐야 한다. 오늘 보고 온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반복해서 연극 '바냐 아저씨'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극의 종반부에 이르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기억에 오래 남을 무대 장면에서 아래의 대사가 등장한다. 극 중 상황에 맞게 등장하는 대사지만 '영화 감상은 취미'라는 말을 방패 삼아 이 대사를 영화에서 떼어내어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대사로서. 어른이란 무엇인지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하면서 묵묵히 살아가야만 할 테니까.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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