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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읽는다고 말해도 되나

by 서곡 2022. 3. 30.

책을 열심히 읽던 차에, 작업실에 쌓여있는 책들이 생각났다. 사놓고는 몇 페이지 펼쳐보지도 않은 마음의 짐들. 그중의 하루키의 (비교적) 신작 '일인칭 단수'가 있었다. 나에게 하루키의 이미지는 오래전 유행했던 어떤 취향의 상징 같은 작가다. 상실의 시대나 1Q84를 읽을 당시의 감상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현란한 말솜씨로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를 읽게 하는 사람, 내지는 글 중간에 꼭 야한 장면이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거나 군 복무 중이었음을 변명 삼아 밝힌다) 장황하게 등장하는 사람 정도로 남아있다. 아, 어쨌든 지금 기준으로 작품에 대한 구체적 인상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읽을 때만은 즐겁게 읽히는 작가라는 인상도 강하다. '일인칭 단수'를 샀을 때도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구매했던 것 같고. 어찌 되었든 재미는 확실히 있을 것 같은 소설. 실제로 오랜만에 다시 펼쳐든 하루키는 역시 읽기 즐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오래전 유행했던 어떤 취향'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사육제'라는 단편소설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내가 하루키를 읽는다고 말해도 되나?' 싶은 생각을 하게 했다.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 여성 F*의 지독하게 못생긴 외모를 길게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못생김이 일반적인 못생김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감흥을 주는 못생김인지를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못생김 뒤에 어떤 취향이 있었고 그 취향을 통해 '내'가 그녀와 가까워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짧은 소설이지만, 이 이후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다. 그냥 단순하게 '못생긴'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얼마나 입체적인 인물이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낸다. 후반부에 이르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한번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확장해낸다. 정말 재밌었다. 그런데, 그래도 내가 '하루키를 읽는다고 말해도 되나?'싶은 마음은 사라지질 않았다. 이야기 하나에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외모를 안 좋게 표현했다는 것만으로 이런 의구심을 가지는 건 너무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 속 하루키가 표현하는 글에서는 크든 작든 그런 시선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성 인물을 묘사할 땐 기본적으로 드러내는 기본 정보에 얼굴과 몸매의 매력도가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아 이것이 '오래전 유행했던 어떤 취향'의 냄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이 '오래전 유행했던 어떤 취향'에 대해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은 아니다. 나는 내게 그런 것을 분석하고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하려면 좀 더... 비판하고자 하는 것과 생물학적/도덕적으로 유리된 삶을 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는 허락된다면 잠시 덮어두자. 내가 고민되는 지점은 좀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혼란이다. 하루키가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단 그럴만한 재주도 없다) 이런 하루키의 글을 읽고 즐거움을 느껴도 될까?에 가깝다. 즐거움을 느낀다면 이 즐거움을 당당하게 표현해도 될까?라는 문제도 함께 한다. 

 

취향이라는 것은 단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3n 년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들어왔고, 아마도 그것들이 내 취향에 조금씩 영향을 주면서 현재 나의 몫인 취향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쌓아올려진 이 탑은, 생각보다 꽤 튼튼해서 내 의지대로 구조변경을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앞으로 공급되는 재료들을 고르고 골라서, 좀 더 양질의, 유연한 재료로 증축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취향은 이렇게 제 자리에서 웬만한 충격이 아니면 움직이지를 않는데,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은 이런저런 사건들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움직인다. 이 취향이라는 탑과 내가 바라보는 '옳은 것'에 대한 관점이 멀어질수록, 하루키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같은 고민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전쟁 게임에서 총성이 들리고 진동이 들리며 내 조준사격으로 무언가 벌어질 때, 그 파괴에서 쾌감을 느끼는 취향이 내 어딘가엔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지구 어딘가에서 실제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느껴도 되는 쾌감일까? 내가 이 전쟁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 가상 전쟁을 가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는 헛소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작업물을 만드는데 협업했던 참가자가 도덕적인 물의를 빚었을 때, 나는 그 참가자와 작업물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작업물 자체도 거부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작업물 - 예컨데 음악을 듣자마자 내가 좋아해버리고 말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해도 될까? 그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 모든 것의 적당한 선은 대체 어디쯤일까.  

 

누군가는 모든 것들에 날을 세워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말하고, 또 누군가는 무시해야 할 것들은 무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마 앞으로도 내 취향은 더디게 움직일 것이고, 동시에 이것을 변명 삼을 수 없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는 일도 잦아질 것 같다. 아마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사과하는 연습뿐인 것 같기도 하다. 제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제가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오래전 유행했던 어떤 취향'의 냄새가 나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용 가능한 취향의 마지노선을 계속 움직여보려고 합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미안하고, 모쪼록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무해한 즐거움을 계속해서 찾아나가 보겠습니다. 아직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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