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속으로 삭혀내기엔 너무 고통스럽고 언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마음 상태를 겪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존에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몇몇 정신건강의학과에 초진 신청을 넣었지만 아무래도 유명한 곳인 만큼 신청 인원이 많았기에 번번이 실패하며 슬픈 마음으로 2주를 흘려보냈다. '이제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작은 일에 다시 마음이 바닥을 치는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솔직한 마음을 전달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린 나는 '이대로 있다간 어떤 식으로든 무너지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주변을 대강 검색해서 네이버 예약으로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상담센터에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첫 상담 이후, mmpi-2 검사 및 해석 상담을 거쳐 추가 4회기 상담까지 총 6회의 인생 첫 상담을 어제 끝마쳤다. 이 글에서는 이 경험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보려고 한다.
당장 빠르게 상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지 가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날은, 이미 한창 마음이 안 좋고 업무도 지칠 대로 지쳐서 일 할 때마다 종종 안 보이는 곳에서 심호흡을 하고 돌아와야 했던 시기 한복판이었다. 프리랜서의 슬픈 점은 이미 하기로 계약한 업무는 내가 겉보기에 멀쩡한 상태라면 속이 어떻게 문드러져 있던 간에 어떻게든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더 이상 일을 지속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들과 계약이 되어있는 일들을 다 마치고 쉬려면 2주는 더 버텨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똑같이 힘든 상황이라도 탈출구가 가까이 보이는 상황과 끝이 아득한 상황은 받아들이는 무게가 다른 법이다. 그날도 처리해야 했던 업무가 특별히 어려웠거나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면서부터 이미 머릿속이 '시발 다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구글 캘린더엔 당장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주에도 빨간색으로 표시된 '스튜디오 업무'가 산더미였다. 이 상태로 2주는 더 웃으며 버텨야 쉴 수 있다니,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빨간 업무 리스트가 너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렀다. 유독 이동시간이 길었던 그날 업무 이동시간에, 상담받을 장소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네이버 예약을 통해 예약을 진행했다. '검사지를 작성하셔야 해서 예약 시간보다 30분 일찍 오셔야 해요.', '네 제가 최대한 맞춰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대화를 전화로 나누었던 것 같다. 그날의 업무를 시간 내에 모두 마치지 못한 상태로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상담소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10분 늦을 것 같은데 상담에 지장이 없을까요?'.
택시에 내려 빠른 걸음으로 상담센터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금 숨이 찼다. 방금 연락드렸던 사람이라 말하고, 데스크의 작은 옆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자주 보던 문장 완성 검사와 빼곡한 질문지. '다들 전부 다 하시진 못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최대한 많이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묘한 목표 의식이 생겼다. 객관식 시험을 잘 맞추기 위한 교육을 십여 년간 받은 한국인의 학습된 경쟁심 같은 느낌이었을 수도 있겠다. 빠르게 사라지는 빈칸들, '역시 나는 시간 안에 다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문장완성 검사를 시작하자 잘 나가던 진도가 턱 막혔다.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르는 말을 바로 쓰는 서술방식과 이것이 심리검사임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결과를 의식하면서 쓰는 서술방식 사이의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결국 문장완성 검사는 거의 완성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어 정신이 없는 상태로 상담사 선생님이 있는 방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첫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상담 시점에서 상담사에게 할 말은 대강 머릿속에 다 정리되어 있었다. 앞서 유명 병원들에 초진 신청을 하고 떨어지고를 두어 번 반복하고 있을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엉망인 감정 상태를 앞으로 만날 상담사분에게 대체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계속 정리하고 또 정리해서 타인에게 전달이 가능한 문장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오는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A에서 시작되긴 했는데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A에 B와 C가 달라붙고 DEFG가 뭉텅이로 날아와서 저를 쳐버리더라고요' 같은 문장들이다. 어색하게 상담실에 앉았을 때 받은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에 머릿속에 정리해놓은 이야기를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상담사의 질문에 페이스를 놓치기도 했지만, 얼추 준비해간 설명을 전부 이야기했다. 집에서 뜨거운 물로 멍하니 샤워하면서 그 문장들을 되뇌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상태였기 때문에 상담사 앞에서 이야기할 때 눈물을 참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언젠가 업무로 대학 교내의 상담실 공간을 촬영하면서 티슈 박스를 치우려고 하자 그 곳의 상담사분이 했던 '티슈는 상담실의 상징 같은 거라서요.'라는 말이 생각났다. 정말로... 그렇네요.
눈물은 흘리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몇 가지 이야기를 이어간 후 상담사분은 다음 상담의 방향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나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본격적인 상담을 진행하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다. 이미 상담센터에 대한 간단한 사전 정보를 알고 왔던 터라 별 거부감 없이 그러겠다고 했고 다음에 이어질 현실적인 이야기, 즉 검사 비용과 상담 비용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상담 종료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상담사가 돈 이야기를 하질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돈 관련된 이야기는 깔끔하고 건조하게 합의하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성격이라 상담사의 이런 태도가 굉장히 의문스러웠다. 돌이켜보니 앞으로 이어질 상담 세션에서 이 상담사에 관해 떨칠 수 없는 미묘한 불신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결국 돈 이야기는 내가 먼저 물어보았고, '원래 상담 비용이 7만 원이니까, 총 12만 원이면 검사 비용이 5만 원만 추가된다고 보시면 되세요' 같은 미묘한 뉘앙스의 대답을 들었다. 나름대로 상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해진 대응 방식이겠거니 하면서 특별히 기분이 나쁘게 듣지는 않았는데, 나보다 상태가 안 좋아 방어적인 심리 상태에 처한 사람이 들었다면 굉장히 장사꾼처럼 보이는 대응 태도이지 않나 생각하면서 센터를 나왔다. 미묘한 불신을 가지고 시작한 상담은 이후로 총 다섯 번이 더 이어진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