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게 연말연초가 지나갔다. 새해에는 글을 좀 더 써봐야겠다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아무런 말도 기록하고 싶지 않은 한 달이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엔 운동하고, 게임하고, 누워있다가 설을 지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오늘이 되었다. 머리 쓰고 싶지 않고 최신작의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싫었기에 담아두었던 작품들을 많이 감상했던 달이 되었다.
음악
01. SINCE - HIGH RISK HIGH RETURN
최근에 자주 선택되는 운동 BGM 앨범. SINCE의 직진하는 발성이 직관적으로 좋은 의미의 공격성을 가지고 운동할 수 있게 한다.
02. 신해경 - 최저낙원
신해경은 항상 그만의 작법으로 음악을 만들기에 새로운 앨범을 들으면 언뜻 '항상 하던 것을 또 했구나'라는 막연한 인상을 품게 한다. 하지만 그간 앨범들의 인상들을 돌이켜 떠올려보면, 앨범아트의 이미지와 밀착된 그 앨범 각각의 정취가 떠오른다. 이번 앨범도 마찬가지다. 아직 '나의 가역반응'이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앨범이긴 하지만, 이 앨범도 곧잘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놓게 될 것 같다.
03. Feng Suave - Warping Youth
따뜻한 풍경을 거니는듯한 앨범. 장르 분류는 다르게 할 수 있겠지만 왠지 Phum Viphurit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상
01. 우리들의 블루스
2022년 연말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해준 드라마. 조금 더 일찍 보았다면 '올해의 무엇 어워드 2022'에 한자리 차지했을지도 모르겠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처음 봤다. 작가의 명성보다는 드라마 제작 전 보게 된 '옴니버스 이야기를 화려한 캐스팅으로 풀어나간다'는 정보를 보고 흥미가 갔다. 물론 그렇게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 명성이 바탕이 된 결정이었겠지만. '어른이 쓴 어른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보는 재미가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배우들이 수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제일 좋았단 사람을 한 명 꼽자면 이정은 배우.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하면서, 관객을 이 드라마에 녹아들게 해주는 일등 공신이다. 다른 여러 에피소드에 이정은 배우가 등장할 때마다 어찌나 든든하던지. 박지환 배우와 최영준 배우가 끌고 가는 장면들도 숨막히게 좋았다. 조연이지만 따로 서사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소별 배우. 별이와 승도의 이야기가 좀 더 풀렸으면 하고 바랬지만, 살짝만 보여주고 에필로그로 넘어가는 게 아쉬웠다.
02.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 작품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걸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화책의 오랜 팬으로서 이 극장판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단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그대로 연출을 맡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사족을 붙였다'기 보다는 이런 전사가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게 되었고, 동시에 단 한 편으로 서사를 끝내야 하므로 만화책 상에서 산왕전 이전에 시작되어 회수되는 여러 장면들이 삭제가 된 것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남은 것은 거의 감사함에 가까운 즐거움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퀄리티로 10부작 2시즌 정도의 드라마가 나온다면 어떨까라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상을 했다. 자막판으로 감상했지만 OTT에 업로드된다면 더빙판으로 한 번 더 감상할 예정. (그래도 원작의 비중이 있는데 채소연을 관중 역할에만 머물게 한 것은 너무했다!)
03. 테드 래소
누구라도 좋아할 법한 코미디 드라마. 비현실적으로 전개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과장된 캐릭터들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현실에서 살아 숨 쉬길 바라게 된다는 것은, 그것이 잘 만든 드라마라는 증명일 것이다. 흔치 않게 시즌 1과 2를 연달아 감상했다. 시즌 1이 좀 더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에 가깝다면, 2부터는 자리 잡은 캐릭터를 활용해 좀 더 진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즌 3가 나올 텐데, 그때도 과연 이 완성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잘 상상이 안 된다. 지금의 완성도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무너져 균형이 깨진다면, 뻔한 교훈을 농담으로 늘어놓는 나이브한 드라마가 되어버릴 위험이 커 보이기 때문.
04. 헌트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인 흥행으로, 그리고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에 입성했다는 것만으로 또 다른 커리어 하이를 구가하고 있는 이정재 배우가... 연출도 잘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적어도 첫 연출작에서는 빈틈이 많이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야심 찬 규모의 첩보 블록버스터를 군더더기 없이 완성시킨 것을 보면 이 사람 내가 섣불리 판단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엔 이정재 배우의 연기 커리어보다 연출 커리어를 더 기대하게 되었다.
게임
01. 코드 베인
전혀 기대 없이 시작한 소울라이크 게임. 프롬에서 제작하지 않은 소울라이크가 대개 그렇듯, 명작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듯한 게임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플레이했다. 이전에 '더 서지'나 '로드 오브 폴른'을 꾹 참고 플레이하다가 중도 하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류작임에도 코드 베인 만의 즐거움이 확실히 있다. 다만 차기작이 나온다면 좀 더 가다듬고 나와주길 애정으로 바라게 되는 작품
02. 이스 오리진
사실 플레이를 시작한 이유 중에는 약간의 의무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세대 기종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이스 시리즈를 웬만하면 클리어해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니 예전 '이스 이터널' 시리즈를 플레이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플레이했다. 전투를 하면서 길을 뚫고, 얻은 아이템으로 갈 수 없었던 길을 가게 만들고, 보스를 만나고, 찾은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착실히 성장해가는 액션 게임을 플레이하는 즐거움의 원형이 있다. 현시적으로 부족한 그래픽이나 부실한 서사는 그러려니 하게 되는 매력은 그 즐거움에서 나온다. (다만 진엔딩을 보려면 세 캐릭터로 반복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1회차 완료 후 하차)
03. 진여신전생 5
여러 의미로 놀라운 게임이다. 굳이 따지자면 외전 시리즈인 '페르소나'의 대성공으로 이쪽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결로 제작하는 것이 좀 더 흥행적으로 쉬운 결정이었을 텐데, 시리즈 3편의 기억이 그대로 떠오르는 하드코어함을 그대로 가져왔다. 플레이타임에 비해 적은 대사로 불친절하게 묘사되는 세계관과 이야기, 세이브 포인트에서만 세이브가 가능한데 전투에서 패배하면 어떠한 선택지도 없이 바로 메뉴 화면으로 돌아가 버리는 가차 없는 시스템. 보스가 아닌 일반 전투에서도 선공을 당하거나 약점에 노출되면 바로 그로기 상태가 돼버리는 난이도,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이 헤매게 만드는 악랄한 지형 구성... 한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는 사실. 내게는 이 시리즈가 일종의 진화된 형태의 어른용 '포켓몬스터' 같다. (양쪽 팬들 모두가 듣는다면 싫어할 비교겠지만)
다른 것들
01. '월간 금지옥엽' 포스터 구독 서비스
생각보다 한국에서 라이센스 포스터를 구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던차에 발견하고 구독했었던 서비스. 포스터 구독 말고도 바이닐이나 책등을 구독할 수도 있다. 물론 모두 영화에 관련된 라인업으로 꾸려진다. 덕분에 좋아하는 영화인 '프란시스 하', '펄프 픽션', '드라이브 마이 카' 등의 포스터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독제다 보니 어느 정도 포스터 수량이 쌓이고 난 이후에는 계속해서 받아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져서 이번 달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를 마지막으로 잠시 구독을 종료하려 한다. 영화 포스터를 구매하기 위해 검색하면 불법 다운로드 이미지를 출력해 파는 것이 뻔한 상품이 대부분인 한국에서 참 존재가 고마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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