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등엔 배낭, 한 손엔 캐리어. 땀이 흘러내리지만, 이 길에서만큼은 불쾌하지 않고,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 에어팟을 귀에 끼운다. 나는 공항으로 갈 때 언제나 프롬Fromm의 음악을 듣는다. 2013년 발매된 1집 <Arrival>의 트랙 중 마음이 내키는 곡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 앨범의 첫 트랙 '도착’은 첫 도입부부터 낯선 도시에 서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다. '마중 가는 길'이라는 트랙은 '도착'과는 반대로 제목에서부터 멀리 떠나오는 이(또는 멀리서 돌아오는 이)를 반기러 공항으로 달려가는 것 같다. 지금 처음 들었다면 오래 듣진 않았을 수도 있을 스타일의 곡이지만, 2013년쯤의 나는 몇 번이고 이 앨범을 돌려 들었다. 그 이후 내내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었다가 여권에 처음 도장이 찍힌 2015년을 시작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공항으로 갈 땐 언제나 프롬Fromm을 듣게 된다. 그 이후로 이 뮤지션은 많은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들을 꼽자면 더 이상 1집의 노래들을 고르진 않겠지만 왠지 그래도 공항 가는 길엔 한 번씩은 들어야만 하는 앨범이다. 심지어 최근의 노래들을 듣다가도 문득 공항 가는 길의 미묘한 공기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삶의 짧게 지나가는 어떤 순간 흘러가는 미묘한 느낌을 돌이켜 기억하게 하는 음악은 참 소중하다. 내 마음대로 편집할 수 없게 마음속에 자리 잡아버린 플레이리스트들.
왠지 봄에서 여름이 다가오고, 날씨가 피부에 와닿게 더워지기 시작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습해지진 않은 기분 좋은 날씨에 유희열의 소품집 <여름날>을 꺼내 듣는다. 2008년, 내가 대학교 1학년일 때 나왔던 음악이고 2022년 현재 14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유희열의 최고 앨범은 이 앨범이다. 더운 날씨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고 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다가올 어떤 것에 희망을 품게 하는 정서가 이 앨범엔 가득 담겨있다. 그야말로 여름날에 어울리는 앨범. 아직도 따뜻한 분위기의 예능에서 BGM으로 종종 흘러나오곤 한다. 심지어 나도 대학교 시절 어떤 여름 MT 영상의 BGM으로 활용했었기도 하다. 지친 몸으로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 창에 머리를 대충 기대고 창문의 진동을 느끼며 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 음악들. 그렇지만 비밀을 고백하자면 세 번째 트랙 '밤의 멜로디'는 종종 제외하고 듣는다.
흐리고 쌀쌀한 겨울날에는 정준일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특히나 <UNDERWATER>앨범을 듣고 있으면 어떤 정취가 떠오르는데, 2016년 1월의 스위스 취리히 풍경이다. 아직 해외 방문 경험도 많지 않았고 영어도 못 하는 당시의 내가, 갑작스러운 경위로 인해 덜컥 머나먼 취리히에서 홀로 출장 기간이 연장돼버려 현지 리터쳐와 한국과의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진행해야 했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 앨범 수록곡의 가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처음 본 유럽 사람들의 모습과 회색빛 도시, 그리고 그 속에 매일매일 긴장하면서 지냈던 마음이 생각난다. 낮에는 업무를 진행해야 했기에 떠오르는 풍경은 대부분 해가 진 이후의 도시 모습. 나무 바닥이 삐걱이던 오래된 호텔의 욕조에 몸을 담그고 봤던 <응답하라 1988>도 강렬한 기억이지만, 두 번째 트랙이자 타이틀곡인 'PLASTIC'을 들으며 어설프게 내린 눈이 쌓여있는 취리히 주택가를 걸으며 보았던 풍경이 중첩된 뿌연 이미지가 내 스위스 기억 중 제일 몸집이 큰 기억이다.
같은 겨울이지만 정준일과는 다르게 레이첼 야마가타Racahel Yamagata의 음악은 김이 서린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낯선 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걷거나,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탈때에는 사운드 클라우드의 Mr. MELODY라는 계정에 올라온 'Sensitive Bwoy - CITYPOP SELECTION'을 듣는다. 특히 이른 오전이나 늦은 밤에 제격이다. 언제부터 이 트랙을 골라 들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한창 시티팝에 빠져있을 때 일본에서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왠지 모를 이유로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카메라를 둘러매고 숙소 밖을 나섰을 때, 떠오르는 햇살의 강렬한 컨트라스트와 출근하는 사람들의 풍경들과 함께 머릿속에 각인 되어버린 음악이다. 보통 서울에서 쓸쓸한 마음으로 산책할 때에는 오지은서영호의 <작은 마음>을 듣는다. 조용한 미술관을 걸을때에는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Playing the Piano>을 습관적으로 듣는다. 안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건강해지셨으면 좋겠다.
오늘 밤은 무슨 음악을 들으며 누울까. 베트남 호치민 작은 호텔에서 잠을 청하면서 듣는 음악이 언젠가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 노래를 넣고 뺄 수 없는 것이 이 마음속 플레이리스트의 단호한 지점이라서 지금 들을 노래가 과연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될지는 몇 년이 흘러봐야 알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일단 잠을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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