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대한 첫 기억은 유치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잘 없는 나에게도 선명히 남아있는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어떤 작은방 속의 풍경이다. 항공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집을 운영했던 우리 집에는 대학생 형들(아마도)이 항상 있었는데, 당시 그 형들 중 하나가 쓰는 작은방 컴퓨터 CRT 모니터로 본 첫 번째 게임이 바로 <울펜슈타인 3D>였다. 맞다, 나치를 쏴 죽이는 게임인 그 울펜슈타인. 어린 시절에 몰입해서 구경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게임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대개는 옆에서 구경만 했던 것 같지만... 가끔씩 자리를 비켜준 형들 덕분에 직접 키보드를 눌러 적을 쏘고, 문을 열고 돌아다닐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쾌감이 지금 기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년기의 기억이니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자극적인 경험이었을까. 이후 초, 중학생 시절에 그 기억을 돌이켜볼때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미지가 플레이어의 체력에 따라 얼굴에서 피를 쏟는 플레이어의 초상화였던 탓에 <둠>을 플레이 했던 것으로 오해했던 적도 있었는데, 미묘하게 다른 기억때문에 정보를 자세히 찾아보니 보다 전작인 <울펜슈타인 3D>가 확실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어른이 된 지금 현실 세계의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매체에서 나오는 폭력에는 꽤나 관대해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유년기의 그 <울펜슈타인 3D> 경험에서 받은 쾌감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그 이후로도 게임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서 꽤 큰 한 축을 담당하는 매체가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컴퓨터학원을 다니면서 학원 컴퓨터에 몰래 설치해 즐겼던 <리에로>와 <포켓 몬스터>(레드 버전을 좋아했다.) 라던지, 중학교 시절 용돈을 모아 산 쥬얼 CD로 즐겼던 <파랜드 택틱스>, 큰 맘먹고 부모님을 졸라 샀던 <창세기전 3>. 그리고 미술 학원에 다니게 된 중3 말에, 내 마음을 이끌었던 제일 큰 목표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으니 나름대로 게임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어린이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 어린이는 시간이 흘러서 단순한 '유희'로서의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가 아니라, 게임 문화와 게임 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종종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좋은 게임을 발견하고 많은 사람이 플레이할 수 있게 추천해야만 하는 것이 좋은 게이머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게임을 즐기는 문화와 게이머들의 커뮤니티 속에 내재된 강력한 혐오와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논의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영화나 음악, 문학에 비해선 너무나 협소하고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향해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서론이 길어졌는데- 게임에 관해 처음 작성하는 이 글에서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도구로서의 게임'이라는 주제에 맞게 떠오르는 게임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볼까 한다. 보다 정확한 의미로 풀어쓰면 '게임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그려내는 게임'을 골라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의 '플레이' 자체가 상호작용이 되기 때문에 기존의 게임 문법을 따르더라도 영화나 문학 등 다른 매체와는 작동 방식이 다르겠지만, 개중에도 두드러지게 플레이어가 취하는 행동 자체를 이야기의 전달 방식으로 멋지게 활용해내는 게임들을 네 가지 골라봤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 파트 2>, <소마>, <스탠리 패러블>, <저니>가 바로 그 게임들이다. 넷 모두 각각의 방식대로 게임이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야기, 그리고 그 너머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떠오르는 대로 간단히 각각의 게임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짧게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만약 이 게임들을 플레이해 볼 예정이 있다면, 이 글을 보지 말고 먼저 플레이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래 게임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니>는 짧은 볼륨의 게임이며, 텍스트를 활용한 이야기 전달이 전혀 없는 게임이다. 주인공은 삭막한 사막을 가로질러, 멀리 보이는 목표로 홀로 이동해야 한다. 아무런 텍스트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시각적인 정보, 예컨대 벽화나 지형지물의 형태와 작동방식 등에 집중하면서 플레이를 하게 되는데, 훌륭하게 다듬어진 비주얼과 사운드를 통해 '홀로 헤쳐나가는' 감각을 느낄 때쯤 어디선가 주인공과 비슷하게 생긴 캐릭터가 나타나 그 여정을 같이 해주고, 때론 도와주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몇 시간의 여행을 마치고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 스태프 롤 첫 화면에 뜨는 누군가의 ID를 통해 깨닫게 된다. 당신의 여정을 함께해 준 캐릭터가 사실은 온라인을 통해 접속한 실제 사람들이었고, 이 게임을 이미 클리어 한 사람들이 재차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당신과 함께 했던 것임을. 아무런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길을 인도해 주는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대개의 플레이어의 반응일 '이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NPC구나'라는 생각을 역이용해 묘한 마음의 위로를 전달하는 독특한 게임.

<스탠리 패러블>은 주인공 스탠리가 지시받은 단순 반복 업무를 체험하는 게임처럼 (잠시 동안은) 보인다.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키보드의 키를 누르라'는 지시를 제외하면 다른 설명은 없다. 하지만 게임에 익숙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가상공간에서 주어지는 재미없는 단순한 지시 (심지어 제목이 '우화'이고 배경 설정이 너무나 상징적이라면)를 반복해 같은 결과를 계속 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는 점차 주어지는 지시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그 순간 그 행동에 반응하는 '내레이터'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게이머는 이 게임의 구조가 주어진 역할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는 기존의 게임에서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이미 결정된 게임 설계'를 피해나가면서 이 세계의 기묘한 이야기를 탐색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단한 게임.

<소마>는 SF 배경을 활용해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렬한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본의 나와 완전히 동일한 뇌 데이터로 작동하는 기계가 눈앞에 있다면 그 기계와 내 자신은 둘 다 '나'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원본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원본이 아니라면? 복사본인 두 개의 기계는 '나'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뇌 스캔을 받고 눈을 떠보니 파멸해가는 미래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 주인공은 생명의 위험을 극복해 나가면서 물리적인 위협보다 더 치명적인 '존재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내 자신이 갑작스레 낯선 세계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몸과 분리되어 뇌 스캔을 통해 작성된 데이터 덩어리일 뿐인 것을 깨달았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이 기계임을 깨닫고 이를 인정한 후, 이것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생존해야 한다.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구조상 매우 중요한 두 지점이 있다. 첫번째 지점에서 주인공은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자신의 정신(=데이터)를 다른 몸으로 이동시켜야만 한다. 익숙한 SF 세계관에서 이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장치를 한단계 더 만든다. 주인공이 다른 몸으로 정신을 전송시킨 이후, 새로운 몸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그 공간을 떠나려는 찰나, 원래의 몸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성공한 거야?', '난 아직 여기 있어'. 주인공은 소스라치게 놀라 조력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 조력자가 대답한다.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정신(=데이터)의 전송은 단순히 A의 것을 B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A의 것을 복사해 B로 붙여 넣는 것이라고. 주인공은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다. A에 남겨진 '원본이었던' 데이터를 제거할 것인지, 그대로 남겨둘 것인지.
그리고 두번째 지점인 이야기의 끝으로 가보자, 수많은 위기 상황을 헤치고, 주인공과 조력자는 유일한 희망인 탈출선에 자신을 전송하고자 한다. 급박한 카운트다운의 끄트머리에, 주인공과 조력자는 탈출선에 성공적으로 몸을 싣는다. 아니, 실었다고 생각했다. 전송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는데, 눈을 떠보니 자신은 그대로 전송기에 남아있고, 눈앞에 보이는 탈출선은 우주로 출발해 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어둠과 정적 속에서 주인공과 조력자는 대화한다. '난 아직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조력자는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정신(=데이터)의 전송은 A의 것을 B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은 성공적으로 탈출선에 복사되었고, 우리는 남겨진 원본 데이터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로 전달되었어도 충분히 강력하게 독자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 매체에서 우리는 자신이 버튼을 눌러 움직이게 하는 화자에게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바로 내가 생존시킨 '주인공'에게. 앞선 전송에서 플레이어가 감각하는 전송은 말 그대로 '이동'이었다. 남겨진 몸에 데이터가 남아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플레이하는 주인공이 아닌 내가 사용했던 몸에 남겨진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다. 찝찝하더라도 새로운 몸을 가진 주인공을 체험하며 게임을 계속 플레이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최종반에 이르러 똑같은 상황을 다시 겪었을 때,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플레이어가 몰입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플레이어의 주인공은 앞서 남겨져서 절규했던 데이터 덩어리와 같은 신세가 된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원본은 이미 소실된 상태에서 복제된 A와 B가 동시에 존재하게 될 때 그 둘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을까? 내가 이입한 '나'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이입하게 된 걸까?
*맥락 전달을 위해 사용한 대사 내용은 실제와 다릅니다.

자타 공인 2020년 최고의 문제작이다. 게임 내의 기존 시리즈 등장인물에 대한 대우, 디렉터의 태도 등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견이 있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이 시리즈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하는 게임의 활용 방식이다. 파트 2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파트 1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트 1은 세상을 파멸시킨 감염 포자에 면역을 가진 어린아이 엘리와, 갑자기 떠안게 된 엘리를 지키고 보호해 나가면서 그녀를 아끼게 되고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엘의 이야기다. 인상적이지만 참신할 것 까진 없는 유사 부녀의 구조를 통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생존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그려냈다.
파트 2의 이야기는 파트 1의 엔딩이 만들어낸 파급 효과로부터 시작한다. 파트 1의 마지막, 엘리를 이용해 치료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연구시설에 엘리를 데려다준 조엘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엘리를 이용해서 치료제를 위한 연구를 시작한다면 엘리는 결국 죽게 된다는 것. 엘리를 살려서 이곳에 데려오기 위한 여정을 계속 해왔는데, 그것이 결국은 엘리를 죽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조엘은 도저히 엘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막아서는 모두를 헤치고 엘리를 구해내고 연구시설을 빠져나간다. 파트 1은 게임성과 스토리텔링, 그리고 엔딩의 강렬한 여운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명작으로 꼽힌다. 그렇지만, 장르적인 재미를 위해 간과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지점이 하나 있었다. 조엘(=플레이어)이 엘리를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을 구해보려 희망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플레이어를 막는 적)을 죽이는 행위는 과연 이해 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파트 2가 시작된다.
파트 2의 믿을 수 없게 대담한 지점,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서 분노를 사게 만들었던 지점은 바로 이 출발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파트 2는 플레이어들에게 한 가지 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파트 1에서 감정을 이입했던 조엘-엘리 관계를 긍정하고 그들에 행한 일들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생각한다면, 파트 2에서 등장하는 애비와 레브는 어떨 것 같아? 애비는 파트 1에서 엘리를 구하기 위해 조엘이 죽였던 의사의 딸이다. 첫 등장부터 애비에게는 타당한 분노가 함께하고 있고, 이 분노를 통해 엘리와 애비 사이의 지독한 대결구도가 시작된다. 게임의 초반부터 중반까지, 플레이어는 기존 파트 1의 주인공이었던 엘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되는데, 이는 어렵지 않다. 1편부터 애정을 쏟았던 엘리와 조엘을 위해서 다가오는 적들을 익숙한 방식으로 살해하면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에 이르러, 게임은 플레이어를 크게 당황시킨다. 이야기의 주인공을 지금까지 적이었던 애비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애비의 이야기는 어떨까? 애비의 이야기에도 나름의 정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복수를 행하고자 하고, 그를 위해 어떤 것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의도치 않게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이에게 변절자 취급을 받게 되고, 지키고자 하는 등장인물인 레브까지 생긴다. 그리고 지독한 추격자가 되어 자신이 아는 사람을 죽여가는 엘리까지 쫓아온다.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고군 분투하는 인물이라는 구조는 당연하게도 파트 1의 조엘이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여기까지 대칭 구조를 만들고 난 후,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질문을 던진다. 네가 감정을 이입했던 전작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관계의 주인공들이, 나름의 당위를 가지고 너를 공격한다면, 너는 어떤 인물을 선택할래? 한 사람에 감정을 이입하기로 선택했다면, 정말 그게 맞는 일일까? 이 모든 폭력의 고리를 근본적으로 끊으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이야기 또한 기존 영상매체로 만들어졌어도 큰 울림을 주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참신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폭력의 순환에서 오는 비참함을 멋지게 이야기하는 명작 영화들은 영화사에 종종 등장하곤 하니까. 하지만 게임 매체로서 이 이야기를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건, 이야기 중반에 자신이 적대했던 인물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이동시켜버리는 전개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조작하고 생존시키는 캐릭터에게 이입을 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자신이 증오했던 캐릭터를 조종해야만 한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자신이 누르는 버튼으로 방금 전까지 이입했던 캐릭터에게 고통을 주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 이 게임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많은 이들이 느낀 그 감정은, 너무나 명확하게 제작자가 의도한 그대로의 고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파트 1과 파트 2를 아울러 만들어낸 복수와 폭력의 허무함에 관한 큰 주제의식과 맞닿아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내가 놀랐던 게임 디테일 하나를 첨언하자면, 플레이어가 적들을 죽일 때의 적들의 인상적인 반응이다. 날 향해 총을 쏘는 적을 사살하면, 어디선가 죽은 적의 이름을 외치며 다른 적이 달려온다. '아아 안돼 OOO!' 같은 느낌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죽인 적이 단순한 NPC 1인 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장르적 쾌감을 위한 폭력과 전투에 충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를 통한 불쾌감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게임. 내가 이 게임의 완성도를 좋게 평가하는 큰 이유다.
+
게임이지만 상호작용 가능한 영화에 가깝다고 보이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종류의 장르는 제외했고, 이야기 보다는 플레이 감각 자체가 주인공 처럼 느껴지는 <잇 테이크 투> 같은 게임도 제외하고 골랐다. 선형적 이야기 전달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파편화된 설정들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프롬 소프트웨어 방식도 아주 좋아하지만 제외했다. <데스 스트랜딩>도 포함시켜야 할까? 싶지만 조금 미묘해서 제외했다. 언급한 게임은 분명히 모두 좋은 게임이지만, 다른 글에서 이야기 해 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내가 영화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듯, 좋은 게임에 대해서도 기록해 남겨보려고 한다. 내 글이 어떤 힘을 가지거나 사회적 파급력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쏘고 죽이고 이겨서 즐거운' 게임 이외의 것들을 찾는 사람들의 선택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혹시 내 의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 다수더라도, 게임 작품을 화제삼아 생각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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