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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게임 하실래요?

by 산책아카이브 2025. 8. 13.

'며칠 전엔가 내가 사이버펑크 2077이라는 게임을 두 번째로 클리어 했거든? 50시간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고 나니까 이만큼 디스토피아 SF 세계관을 잘 그려낸 작품이 있나 싶더라. 아 무슨 내용이냐면 주인공이 V라는 이름인데 나이트 시티라는 도시에 살거든, 그런데 말이야...'

 
-라는 상상 속 문장은 현실의 내 삶에선 음성으로 절대 옮겨지지 않는다. 어렸을 적 PC방이 주 놀이터였던 시절엔 친구와 게임을 같이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모두가 각자 다른 취향과 다른 관심사를 가지며 서로 다른 템포로 살아가는 30대 어른의 삶에서는 좀처럼 꺼내지지 않는 화제다. 게임 전체로 봐도 그렇지만, 그 영역이 싱글 플레이 콘솔게임이 되면 아예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갓겜 또는 망겜'으로 양분되는 게임 커뮤니티들의 여론 흐름은 그곳에서 관심 있게 읽어볼 의견을 찾을 의욕을 사라지게 한다. 굳이 투덜대고는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느껴온 것이고 이제는 의견을 나눌 큰 욕심조차 없어졌다. 그냥 감흥의 대부분을 속으로 삭히다가, 가끔 유튜브에서 'OOO scene reaction' 정도를 검색해서 간접적으로 해소할 뿐이다. 
 
그러다 작년부터 카더정원 유튜브 보드게임 영상에 자극받아 보드게임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보드게임 그룹에 내가 뒤늦게 참여하게 되어서, 덕분에 한 달에 한두 번씩 꾸준히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공간이 놀고 있는 작업실도 있어서 모임의 60% 정도는 내 작업실에 모여서 진행하게 되었다. 보드게임 카페에서 플레이해 보고 재밌었던 게임을 직접 구매해서 작업실에 비치해 놓기도 하게됐고. 예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형태와 규칙의 보드게임을 접하다 보니 오래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또 하나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동시에 디지털 게임도 계속 즐기고 있는 나는, 여러모로 자연스럽게 디지털 게임과 아날로그 보드게임의 경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 잦다. 잠시만 떠올려봐도 현세대의 디지털 게임은 플레이어의 몰입을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로 무장하고 있다. 비단 그래픽이나 사운드 뿐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컨트롤러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소리, 플레이어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연출적 기술들, 선택에 따라 반응하는 세계, 인터넷을 통한 타인과의 협력 또는 경쟁,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콘텐츠 업데이트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장치들은 플레이어가 설명서를 따로 읽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게임의 규칙을 익히고 그 세상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 화면 뒤에 숨어서 정교하게 계산되고 있다. 게임을 새로 접할 때마다 번거롭게 설명서를 몇 번 정독하고, '에러 플레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혼자 테스트 플레이를 해봐야 하는 경우도 있는 보드게임이란 장르에 비하면 참 간편하다. 게임을 구매하고 - 설치하고 - 시작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단순한 방식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단순함을 즐기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하는 몇 가지 기본조건이 있다는 점 때문에, 내가 게임이라는 장르를 좋아함에도 남들에게 영업할 생각을 못 하고 대부분 혼자 즐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나마 입문 장벽이 낮은 닌텐도 게임 중 하나인 '슈퍼마리오 오디세이'를 친한 누군가에게 추천해 본다고 생각해 보자. 일단 고려해야 할 조건은 게임을 플레이할 '스위치'가 있는가? 이다. 두 번째는 게임 컨트롤러의 조작이 익숙한가-도 고려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게임을 해온 사람들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를 수 있지만, 지금까지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컨트롤러를 쥐여주고 플레이를 시켜본 결과 대부분은 왼손 엄지로 캐릭터를 이동하고 오른손 엄지로 시야를 돌리는 것부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야를 돌려 상황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캐릭터를 움직이고 적절한 타이밍에 점프 버튼을 누르는 것부터가 큰 장벽이라는 소리다. 이 조건들을 뛰어넘어서 플레이가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친다면,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게임 내 목표를 달성하는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 여부다. 슈퍼마리오라고 치면 열심히 점프해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해 내는 것에 재미를 느껴야 하고, 스토리 중심의 게임이라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여러 과제를 소화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야 하고, 오픈월드 게임이라면 그 가상의 세상을 탐험하는 데 재미를 느껴야 한다. '이게 뭐가 재밌어? 나는 뭘 해야 해? 퍼즐이 왜 이렇게 많아?'라는 질문이 나오는 순간 게이머들에게 칭송받는 명작이어도 실패하는 게임이 된다. 3D 멀미가 있거나 순발력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확 줄어들기도 한다. 게임에 따라선 일종의 서브컬쳐 항마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한 번에 2시간 남짓의 개인 시간을 집에서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을 따져보면 '같이 게임 하실래요?' 같은 말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말이 된다. 
 

이런 '진입장벽'은 아날로그 보드게임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보드게임에도 진입장벽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디지털 게임보다는 훨씬 낮다고 생각하는데, 제일 큰 이유는 일단 시작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디지털 게임을 구동하기 위한 콘솔 또는 PC가 필요 없고, 조작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으며, 심지어는 입문자에겐 큰돈도 들지 않는다. 내가 보드게임을 사놓으면,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추가 비용 없이 게임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처음 보드게임을 구매했을 때 내가 한 생각이기도 한데, '한 번만 돈을 지불하면 박스에 실물도 들어있는 데다가 두고두고 여러 명이 함께 할 수 있다니 이렇게 저렴한 취미일 수가?' 라는 것이다. (⁕참고 : 보드게임 초급자의 생각으로 고웨이트 테마게임 풀확장 등등은 전혀 고려 안 한 순수한 생각입니다.)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같이 경쟁하고, 협력하고,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장르도 다양해서 여러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아우르기도 쉽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결국 -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혼자 하는 디지털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의 전부가 게임 그 자체의 완성도에서 온다면, 보드게임은 재미의 5할 이상이 사람에게서 온다. 보드게임의 규칙은 그 자체로 재밌어야 하기도 하지만, 참여자 각자에게 각기 다른 반응을 끌어 낼 수 있는 규칙이기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골려주는 재미로, 어떤 사람은 허풍을 통한 심리전으로, 어떤 사람은 운에 모든 것을 거는 방식으로 게임을 한다. 하나의 규칙으로 묶인 다채로운 반응들이 뒤섞이는 게 보드게임의 큰 재미 요소인 것이다. 그래서 같은 게임을 내놔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이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2-30년 전에 설계된 게임이 현시점에서도 활발하고 즐겁게 플레이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지 않을까? 규칙이 오래되어도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모두 현재진행이므로.
 
내일모레 아침 일찍 (내 기준 거의 새벽) 코리아보드게임즈의 창고개방전에 가기로 했다. 온라인으로도 구할 수 있는 물건을 굳이 일찍 일어나서 파주까지 가서 사 오는 이유는 그냥 한 번 그래볼까 싶어서다. 보드게임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 싶기도 하고, 당분간 재밌게 즐길 문화의 한 풍경을 관찰하고 싶기도 한가보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되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게임을 몇 개 집어와 작업실에 두어야지. 당장 플레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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