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계속 바래왔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의 부침을 겪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언젠가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비롯된 바램이었을 것이다. 묵묵히 참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기 힘들어 상담도 받고, 이 블로그도 만들어 억지로 글도 쓰고, 해외로 떠나고, 한참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해보고, 운동하고, 노래 부르고, 슬퍼하고, 열심히 버텼다. 내 예상보다 깊고 오래도록 힘들던 마음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전의 나로는 이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된 이후다. 이전의 나로 돌아간다면 결국 다시 슬퍼질 테니. 생각을 다시 쌓아 올려서 '조금 다른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자 무력한 마음이 줄어들고 하고 싶은 일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2022년이 다섯시간 남짓 남은 지금의 나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있고 쓸쓸하지만 묘한 기대감을 가진채로 항상 앉아있는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11월부터 연말인 지금까지 어쩌다 보니 숨 쉴 틈 없이 달려왔다. 몇 년 만에 사진집을 만들어서 독립출판 페어에 참가했던 것이 11월 초, 그것을 준비하기 시작한 기간부터 바빴으니 거의 정확히 두 달간을 달려온 셈이다. 일이 잘 풀리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기대와 달리 크고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오랜만에 나간 페어에서는 내 책을 살펴보지도 않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독서와 낙서로 시간을 보냈고, 이 정도는 팔리겠지 싶어 만들었던 포스터와 사진엽서들은 거의 그대로 남아 둘 곳이 없어 폐지로 버려야 했다. 그 다음주에 날아간 도쿄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큰 지출을 해버리고 앞서 소비한 책들의 제작비용과 함께 눈덩이가 되어 오랜만에 회복되나 싶었던 통장 잔고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여행 영상을 더 잘 만들고자 샀던 아이폰과 이미 할부로 지출한 웨이트 트레이닝 PT 비용까지. 분명 일을 열심히 해왔고 연말쯤이면 일을 잠시 쉬었던 상반기의 여파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지금 이 순간까지 마이너스를 간신히 피하는 정도로 경제적 파도를 헤쳐 나가고 있다. 부족한 여가시간과 불안한 잔고 사이를 지나다 보니 아직 튼튼하게 회복하지 못한 마음이 이따금 바닥에 펼쳐진 레고 같은 것 따위를 밟고 고꾸라지기도 했다.
요즘 즐겁게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뒤 돌아, (중략)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 텅 빈 바다만 한참 바라보고 있는 인물에게 반대 방향의 섬 제주도를 바라보게 하며 던진 말이다. 그 말처럼 이번 연말의 크고 작은 실패에서 등을 돌려 그 반대편을 바라본다면 내가 '조금 다른 자신'이 되기 위해 쌓아 올린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랜만에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사진집이라든지, 운동 중량이 크게 늘었고 허리통증을 느낀 지 오래됐다든지,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회복했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통장에 큰 출혈을 만들어버린 도쿄행은 3박 4일간의 기간 동안 매일매일이 즐거운 기억들이었다는 것이나 꾸준히 받은 보컬 트레이닝으로 오랜 역류성 식도염 증상으로 상해버린 발성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점 같은 것들. 숨 쉴 틈 없이 보낸 연말은 그런 성공들을 쌓아 올리고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그것들을 꾸준히 생각해주어야 한다.
내 핸드폰 속 메모장에는 업무 관련 내용을 정리한 글과 함께 나란히 고정된 메모가 하나 있다. 한창 마음이 지치고 힘들었을 당시 틈틈이 꺼내 볼 요량으로 내 다짐을 쓰기도 하고 주변에서 보고 들은 말을 옮겨 적기도 한 짧은 리스트다. 마지막 수정은 7월 말쯤인데, 그 이후로 몇 번 정도는 다시 열어서 새겨보다가 최근 두세 달간은 한 번도 그 메모를 다시 열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좋은 징후로 여겨야겠지? 이 리스트를 새해에 다시 꺼내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 리스트 중 몇 가지만 이 글에 옮겨 기록해보려고 한다.
- 힘들더라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더욱 노력할 것, 좋은 대화를 위해 힘쓸 것. 말투를 살필 것. 신념을 버리지 말 것
- 사람 많은 자리가 피곤하더라도 시도는 해볼 것
- 일은 삶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충분한 보상을 주고 고통을 주는 일은 피하자. 소진될 것 같으면 단호히 휴식을 갖자.
- 좋은 대화는 좋은 경험과 좋은 감상에서 나온다. 잊지 말자.
-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그들을 이해해주고 동시에 이해 받자.
-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 많은 것을 궁금해하자.
- 사건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사건이 나를 통과하게 두자. 사건이 흘러간 통로는 지혜로운 이야기를 가지게 된다.
연말에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면 으레 등장하는 화제는 역시 새해의 계획이다. 장기 계획을 잘 짜지 않는 성격의 나로서는 매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웃으며 진심이 섞이지 않은 대답을 하곤 했는데, 올해도 그런 대답을 하다 나도 모르게 했던 말이 있다. '지금 하는 만큼만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하려고요.'라고. 꾸준히 하다 보면, 꾸준히 뭔가를 쌓아 올리다 보면 언젠가 다른 풍경을 보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지 않아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정도는 되겠지. 지금으로선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2023년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 않으며 보낼 수 있을 것이고 2023년 12월 31일 즈음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해를 회고하는 글을 쓰며 그 글의 제목을 자신 있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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