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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by 서곡 2022. 9. 20.

여름이 끝났다고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느지막이 찾아온 몇 개의 태풍이 지나가고, 추석이 한참 지난날들 답지않게 습했던 공기가 거짓말같이 선선해진 오늘에야말로 드디어 이번 여름이 끝났다는 감각이 피부로 느껴진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밤 풍경이 펼쳐지고, 차가운 커피를 시키기 전에 한번은 고민을 해봐야 하는 시기. 더운 시절 내내 방에 걸어만 두었던 헤드폰으로 귀를 덮어도 땀이 나지 않는 시기. 드디어 올해의 괴로움을 하나 덜어냈다고 느껴지는 오늘에야말로 지난여름을 되짚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가 아니라 계절기를 남긴다고 해야 할까. 

 

지난 추석에 잠시 가족모임을 가지러 본가로 돌아갔을 때 '등이 많이 펴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평생을 구부정한 등으로 살아왔던 내가 작년부터 유지해온 필라테스 수업과 스트레칭, 최근 들어 종목을 바꿔 시작한 근력운동 덕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이 좋아진 자세로 걷고 앉고 일하고 있다. 운동의 중요성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고 '배움의 중요성'을 올해 들어 항상 느끼고 있다. 필라테스와 근력운동 모두 1:1 수업으로 기본부터 하나씩 배워가면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매번 수업마다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서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 하지만 매번 매 순간이 위기다. 

 

몸을 움직이는 것 말고도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벌써 6개월째 접어든 보컬 트레이닝 수업인데, 특별한 목적이 없는 수업인 만큼 딱히 연습은 열심히 안 하지만 역시 매번 수업이 즐겁다. 특별한 성취를 얻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분야를 취미로 삼는 게 좋다고 하는데, 내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정확히 그렇다. 단순히 노래방을 가서 소리를 지르거나 남들에게 내 노래를 뽐내서 즐거움을 얻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즐거움이다. 좋아하는 곡을 연습해서 그 노래의 디테일들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본다는 것은. 노래에 대한 내 생각은 언젠가 따로 독립된 글로 풀어서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아직 시작은 하지 않았지만 연말 일본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볼까 한다. 구몬 일본어 1년 경력에 빛나는 내 소박한 일본어 실력이 코로나 3년을 계기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중인 것 같은데 이대로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어서 과외를 구해서 이번 주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부디 꾸준할 수 있기를.

 

경제적으로는 올해 여름은 전반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연초부터 몇 가지 이유로 일을 줄이고 몸과 마음 추스리기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쓰면서 지냈던 데다가, 7월의 베트남 호치민 여행으로 확실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8월부터는 여느 때보다 일을 많이 했고 그 바쁨이 얼마 전에 끝났는데, 업무의 종료 시점과 입금 일정에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니 아직도 내 잔고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내 업무의 특성상 일을 많이 할수록 먼저 내 돈을 써서 업무를 처리하고 나중에 보상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면 한창 바쁘게 일은 하고 있는데 피곤한 상황에서 돈도 아껴가며 생활해야 하는 워킹 푸어 시기가 닥칠 수 있다. 지금 내 신세가 정확히 그렇다. 다행인 것은 버틴 만큼 언젠가는 다시 회복될 것이 확실하다는 희망이다. 전적으로 클라이언트의 예산 처리 일정에 달린 임시 보릿고개. 

 

잔고는 빠듯하고 일은 바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데 시간을 쏟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잠시간 개인적인 슬픔과 불안들은 희석된다. 결국은 언젠가 다시 대면하게 되기 마련이겠지만 당장의 마취 효과는 확실하고 내겐 그것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사실 여름의 시작 즈음에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모든 일들은 큰 이변 없이 그 걱정 그대로 실현되어버리고 말았다. 즐거운 상상은 항상 막연하게 하는데 불안한 상상은 항상 현실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내 기본 속성값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모든 것이 실현된 지금 내 기분은 그것들을 예측했을 때보단 훨씬 홀가분해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여전히 알 수는 없고, 마음이 안심할 때쯤 항상 마음을 흔드는 일들이 발생하곤 하지만 - 내가 서 있는 땅이 단단하게 여물지 않은 모래바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위에 땅이 버틸 수 있는 만큼의 사람과 물건을 두는 일이 중요하다. 각각의 무게를 분산시킬 방법을 고민하면서. 

 

오늘 작업실에 나오면서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들르려 했던 샌드위치 가게, 이 글을 쓰기 위해 가려 했던 근처 카페 둘 모두가 폐점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불과 날씨가 안 좋아서 방문하지 않았던 몇 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처음 이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집 근처 카페도 두 달 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엔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이별들이 어떤 상징이나 징후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해석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적당히 신경을 끄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태풍이 지나가도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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