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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들여다보기 #1

서곡 2022. 3. 30. 22:53

지금은 리모델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립하기 전 내 방. 그 곳에는 어린 시절 이사 들어올 때부터 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책장 일체형 책상이 있었다. 왼쪽에는 키보다 높은 책장과 작은 서랍들로 구성되어있고, 가로로 이어진 상판에는 컴퓨터를 놓을 수 있게 슬라이드 키보드 서랍과 지지대로 3단 서랍이 붙어 있는 투박한 책상. 25년 정도 내 방에 존재하면서 실제로는 책상으로 활용했던 기간보다 물건을 적당히 쌓아 올려놓는 지지대 역할을 한 기간이 아마도 더 많을 물건. 작은 서랍을 뒤지다 보면 초등학교 시절 가정통신문 같은 게 나올 것 같은 (실제로 비슷한게 나왔다.) 내 방에서 제일 방치된 공간. 그 낡은 책장의 책상 바로 윗 칸에는 내가 사용했던 연습장들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는 칸이 있었다. 나름대로 수없이 대청소를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던 물건인데, 아무래도 집을 공사해야 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 먼지 쌓인 링 노트들을 내가 가지고 나와서 보관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 버려야만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다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버리기는 마음이 너무 아쉬워서, 최소한 한 번 펼쳐보기라도 하고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동시에 웃기다 싶은 것들은 사진으로 기록 하기로 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차마 들춰보기 힘들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는 영영 하지 않을 것 같은 정리를 이 곳에 기록해본다. 

*비상시 공부 공책으로 쓸 수 있음

공책들에 연도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그린 공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 실력으로 대충 정리해서 어린시절의 공책부터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는 유난히 어린 시절의 선명한 기억이 많지 않은데, 대개의 기억은 어떤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편이 아니고, 대충 흐릿한 이미지와 느낌만 떠오르는 정도다. 실제로 성인이 되어서 나를 알아보는 유년기의 친구들을 몇 번 만날 때마다 나는 상대방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쩔쩔맸던 적이 여러 번 있을 정도로...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항상 뭔가를 낙서하고 있는 어린이었다는 기억은 확실하다. 학교에서 교과서 귀퉁이에, 시험지 뒷면에, 집에 와서는 거실에서 엎드려서 뭔가를 그리는 어린이. 기억이 흐릿한 이유를 당최 알 수 없지만 너무 종이 속 상상에 빠져 살아서 그랬을까? 그 정도 수준이었다면 정말 괴상해 보이는 괴짜 어린이였을 듯 하다. 쉬는 시간마다 계속 종이에 만화나 게임 속 등장인물을 나름대로 재해석 해서 그려 놓는 괴짜 어린이.

샤먼 킹을 좋아했었나 보다 (완결 전이었다.)

단순히 그림만 그려놓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의 나는 '설정 놀이'라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당시 유행했던 '바람의 나라'나 '어둠의 전설' 등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 같은데, 이런 머그 게임(당시 표현-MUG:Multi User Graphic)의 공략집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었던 것 같다. 이런 무기는 공격력이 얼마고,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전직을 하면 얼마나 강해지고 등등이 상세하게 정리된 책. '설정 놀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게임적 수치들을 내가 가상으로 만든 만화 또는 게임에 대입시켜 이런 저런 설정들을 만들어 적어놓는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꽤 열심히 '창작'을 해서 그렸다고 생각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 와서 보면 죄다 어딘가에서 본 레퍼런스들이 그대로 보이는 것들이라 웃음이 난다. 정말 괴상한 어린아이였다.  

이건 누가 봐도 철권 레퍼런스다. 시리즈 넘버링 별로 늘어나는 캐릭터가 늘어나게 설정한 것도 있다. 철권 2, 3, 태그 토너먼트를 보고 감명받았나 싶다.
마찬가지로 철권 레퍼런스, 이런 기술 설정까지 작성하는 게 나의 '설정 놀이'였다. 동시에 아래 설정이 다른 캐릭터가 있는 것은 역시 킹 오브 파이터 레퍼런스다 (소위 '미친 이오리', '미친 레오나' 같은 것들)
이 부분은 바로 머그 게임의 공략집과 그대로 연결되는 부분. 왼쪽의 영어 이름 밑 한글 번역...의 수준이 대단한데 국사 시간에 등장하는 유물에 어떤 감명이라도 받았나 추측된다. 동시에 오른쪽 그림에서는 왠지 디지몬 어드벤처와 메가맨의 향기도 난다. 

아마도 '설정 놀이'에서 중요했던 지점은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창작한 설정 계보도에서 상단에 등장하는 기본 물건 또는 캐릭터는 모양이 단순해야 했고, 이것들이 성장하면서 좀 더 멋있어 보이는 장식이 달리거나 화려해지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실제로 그 당시 게임들의 대부분의 설정들이 그랬었기 때문에 영향을 그대로 받았을 것이다. 목검에서 시작하는 바람의 나라 라던지, 숏 소드부터 시작하는 JRPG 게임이라던지. 일반 기술과 필살기, 초필살기, EX 초필살기 등등이 나눠지는 격투 게임도 그렇고. 

 

좀 더 텍스트 기반의 설정, 그리고 실제 공부에도 적용을 시킨 모습
웜즈도 했었던 것 같다! 이것도 시리즈 별로 다양한 맵을 그렸다. 우측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드게임이라도 구상한 듯.

그 당시엔 앞으로 이런 걸 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려댔던 것 같지는 않고, 이 일이 순수하게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랬으니까 꽤 많은 양을 그려낼 수 있었고 링 노트 한 권을 다 끝내면 뿌듯해 하고 그랬겠지. 이걸 좋아하는 걸로 어떤 미래를 그려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다음 글에 정리할지도 모를 한참 뒤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도 꽤 부끄러운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는데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어서 중-고등학교 시절의 그림까지 정리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년은 지난 일을 꺼내는 게 왜 이렇게 부끄러울까...? 사람 머릿속은 참 알 수 없다. 마지막 사진은 그림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귀여운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한 컷이다. 

버디버디 아이디다! 공개해도 이젠 문제 없을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