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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e

서곡 2023. 4. 3. 20:57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시부야 케이나 누자베스류의 일본발 음악을 찾아 듣던 시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으레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빠져드는 계기가 된 곡은 'Merry Christmas Mr. Lawrence'였다. 들었을 당시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영화음악인 줄도 몰랐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한결 더 신비로워 보였던 제목으로 수많은 상상을 하게 하곤 했었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어떤 상황을,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만든 곡일지 상상하는 일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지금 현재에 비할 수 없는 몽상가(또는 망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연주를 듣고 있으면 대개는 눈이 내리는 넓은 평야를 상상하곤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몇 년간 잠시 나의 <좋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틀지 않는 앨범들로 이루어진 비활성화 플레이리스트> 속에 들어가 있던 음악들은 한 장의 앨범으로 인해서 다시 내 <활성화된 플레이리스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앨범이 바로 'Playing the Piano(2009)'다. 그 앨범을 플레이하기 시작하면 첫 곡으로 'Amore'가 흘러나온다. 반복되는 음으로 차분하게 쌓아 올라가는 피아노곡. 그리고 미묘한 엇박으로 진행되는 주선율의 어긋나는 박자들을 듣고 있으면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상황에서 잠시 분리되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이 리듬을 조용히 관찰하며 듣는 것의 매력을 느껴버린 이후엔 전시장에서, 산책길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야간비행을 하면서 제일 먼저 찾는 곡이 되었다. 그렇게 사랑하며 즐기던 곡은 한순간에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져버리게 되었는데, 내가 사용하는 음원서비스에서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2020년의 라이브를 담은 'Playing the Piano 12122020'은 계속 들을 수 있었지만, 이 앨범에는 'Amore'가 수록되어있지 않았다. 그런 아쉬움을 'Three'나, 'UTAU', 'Tony Takitani'를 들으며 달랬지만 그럴 때마다 2009년 버전의 'Amore'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제 류이치 사카모토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또다시 'Amore' 생각이 났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내가 듣던 버전의 음원을 찾아냈다. 공식 음원이 아닌 음원이 유튜브에서 8년째 살아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딘가 열화된 음질의 'Amore'를 오랜만에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제일 최근에 발매한 그의 앨범 '12'에 라이크 버튼만 눌러두고 한 번도 재생해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일부러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나의 지금의 소리입니다.'라는 그의 말이 앨범 소개 글 말미에 적혀있었다. 오랜만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서 그 앨범을 재생해놓고 잠을 청했다. 많은 삶의 장면들과 생각들을 멋지게 다듬어준 그의 음악을 기억하며.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추모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