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 것들 #13
'좋아한 것들'로 글을 쓸 때가 한참 지났지만,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많지 않아 몇 주간 미루다가 이제서야 쓴다.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계속 찾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면 지금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시기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들이 극장에 걸렸다 금세 내려가고 있지만 별로 아쉽지 않은 시기. 마음이 동할 때 언제고 다시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괜찮다. 음악도, 책도 마찬가지다. 아, 게임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지만 호흡이 긴 작품을 한참 동안 진행하고 있는 탓에 이 또한 쓸 내용이 없다.
음악
01. JUSTHIS & Paloalto - 4 the Youth
팔로알토의 랩은 언제나 든든하다. 비트와 랩에 충실하게 꽉 채워진 무려 22곡의 앨범. 주로 운동할 때 많이 손이 갔던 앨범이다.
02. 권진아 - The Flag
오래전부터 권진아 음악을 간간이 들어오면서 느껴오던 개인적인 미묘한 아쉬움이 있다. 목소리에서 오는 강렬한 느낌을 음악들이 충분히 서포트해주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타 아티스트의 노래를 커버할 때마다 좋다고 느끼는데 정작 개인 앨범은 손이 안 갔었다. 이번 앨범에선 어떤 점이 바뀌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예전의 앨범에 비해 좀 더 '물이 올랐다'는 느낌이 있다. 곡의 완성도로서도, 아티스트에게 쏟아지는 주목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도. 꾸준히 팔로우 업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
03. Aimyon - Excitement of Youth
일본어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틈틈이 보는 일본어 컨텐츠의 나비효과가 나를 아이묭 라이브 영상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 앨범 자체를 돌려 듣는다기보단 아티스트의 대표곡 상위 10개 정도를 자주 듣고 있다.
04. So!yoON! - Episode1 : Love
인트로나 스킷을 포함해 앨범 전체가 하나의 곡처럼 들리는 앨범을 예전부터 좋아했다. 요즘엔 그런 식으로 앨범을 만드는 아티스트가 적다 보니, 간간히 나오는 이런 앨범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비비의 앨범도 그랬다) 게다가 나잠수의 'Till the sun goes up'을 멋지게 편곡해서 수록하다니. 원곡의 좋은 의미로서의 가볍고 쉬운 그루브도 좋지만, 황소윤 버전의 비교적 끈적한 보컬과 함께 이어지는 베이스 연주가 참 좋다.
05. 코드 쿤스트 - Remember Archive
코스 쿤스트의 비트는 항상 둥글고 꽉 차있다는 감각이 있다. 에어팟을 빼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게 만드는 사운드.
도서
01. OOO - 지역의 사생활 99 : 전주
네컷만화 위주의 작업을 주로 진행하던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는지 궁금했다. 여전히 한 페이지에 네 컷이지만, 귀여운 상상들이 이어지는 가이드 투어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긴 이야기를 완성한다. 자신의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변주시키는 작가들을 볼 때 종종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내 스스로에겐 별로 없는 감각인 탓에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영상
01. 신문기자
심은경 배우의 일본어 연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고른 영화다. 한국에서 잠시 보이지 않더니 (배우 본인에겐 잠시가 아니겠지만) 어느새 일본 영화에서 일본인 연기를 일본어로 하고 어떻게 그것으로 일본 아카데미에서 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사회적 맥락을 깊게 알지 못하다 보니 영화 자체는 '준수한 영화' 정도의 감상만 느끼게 되었지만 영화 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케이스. 그 이외에 인상적이었던 점도 하나 있다. 사회 고발 영화로서 충분히 현실의 사건을 반영한 줄 알았는데, 실제 사건 그대로 제작되지 못하고 큰 틀만 비슷하고 전혀 다른 사건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일본의 사회에서 정치를 작품으로서 다루는 분위기란 어떤 걸까,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 영화.
02. 커뮤니티 시즌 6
솔직히 말하면 커뮤니티의 모든 시즌 중에 제일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커뮤니티가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은, 제작진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캐릭터들도 여럿이 하차했고, 그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캐릭터들을 관객에게 제대로 소개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기엔 남은 에피소드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시즌 6 이후에 새로운 시즌 제작이 힘들 것 같다는 것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 극은 순수하게 잘 마무리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이 슬프기도 하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된다. 제작 중단이 결정되어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사라져버리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더군다나 작품 내내 계속 외쳐왔던 #sixseasonsandamovie가 정말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작품에 딱 알맞은 결말이지 않을까. 언젠가 영화로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03. 미스틱 리버
숀 펜의 표정, 그리고 관객에게 던지는 이야기.
04. 웬즈데이
어릴 때 보았다면 환장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팀 버튼의 해리포터'라는 표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뻔할지 모르는 이야기 구조도 팀버튼 필터를 거쳐서 나오면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다만 중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이니드의 서사가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편의적으로 사용되어서 아쉽지만, 다음 시즌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시즌 2를 기대해봐야겠다.
05. 남한산성
오징어 게임에 발목 잡힌(?) 황동혁 감독이 데스 게임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다른 작품을 만들었으면 하게 바라게 만든 작품. 전투 장면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로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연들의 연기가 중요한데, 역시 그에 걸맞은 배우들이 호연을 보여준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감독이라는 것을 알고 봤는데 생각보단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장면은 적지만, 시종일관 푸르스름한 화면과 어우러지는 처연한 감정을 잘 이끌어내 준다. 영화를 본 이후에 따로 '출성'같은 곡을 들어볼 때면 너무나 류이치 사카모토 같은 곡들.
게임
01. 호라이즌 : 포비든 웨스트
전작 '호라이즌 : 제로 던'을 심드렁하게 플레이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전작의 제일 큰 감상은 '땅은 넓은데 할 건 별로 없다.'는 인상이었고 그것은 내가 평소 오픈 월드 게임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벤트가 가득한 오픈월드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 면에서 후속작 포비든 웨스트는 적절한 규모와 밀도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하다. 더군다나 차세대 게임들 속에서도 보기 힘든 높은 그래픽 수준으로 구현되어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게임의 재미는 그래픽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 내 평소 철학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퀄리티의 그래픽이라면 게임 속 세상을 플레이어에게 한결 더 매력적으로 선보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메인 스토리의 구조가 취향이었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지만, 서브 퀘스트로 만나게 된 캐릭터들을 단발성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한 번씩 되짚어 볼 수 있는 이벤트라든지, 나의 행동으로 인한 월드 환경의 변화 등이 사소하게나마 구현이 되어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다만 충실히 이야기를 즐기면서 플레이하다 보면 마지막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기도 전에 캐릭터가 더 이상 크게 성장하지 않는 구간이 생긴다는 것이 아쉬웠다. 거의 확실히 후속작이 나올 텐데, 이 정도 만족도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될 것 같다. 일단 4월에 발매한다는 Burning Shores부터.
02. 슈퍼 핫
발매가 오래된 게임이라 이미 게임의 진행방식은 잘 알고 있었지만, 스토리텔링 방식이 이럴 줄은 몰랐다. 대개의 추천에서 이 게임의 독특한 플레이 방식만을 언급하고 하기 때문이다. 안 해본 사람을 위한 배려일까? 이곳에서 자세히 언급하면 그것도 나름의 스포일러 일테니 궁금하다면 플레이해보길 바란다. 짧은 플레이타임을 가지면서도, 게임의 컨셉에 잘 녹아든 이 스토리텔링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다른 것들
01. 독립 서점들의 풍경들
최근 개인적으로 제작한 사진집을 독립서점에 조금씩 입고하면서 오랜만에 서점 투어를 돌고 있다. 그래봐야 10개도 안 되는 규모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소규모 책방의 풍경과, 그 속에서 여러 작가들의 서로 다른 결의 외침을 담고 있는 책들을 바라보니 기분이 묘하다. 몇 년 전에는 그 풍경 속에 내가 항상 있다고 느꼈는데, 어느새 경계선에만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직 다시 본격적으로 그 안으로 뛰어들지, 계속 발만 걸치고 있을지, 단호히 원 밖으로 뛰쳐나갈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길게 풀어봐야 할 이야기일 것 같다. 하지만 확실한 건, 독립 서점들에서 진열된 책들중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 보는 것에서 얻는 에너지는 웬만한 전시회 방문보다 더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