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9 - 10.21] 베트남 하노이

출국하기 며칠 전부터 확인한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계속 맑은 날씨에 최고기온 30도 정도를 유지하던 날씨가 내가 하노이에 머무르는 단 3일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내내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최고기온은 뚝 떨어진 20도. 이게 대체 무슨 불운이지?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외투와 비바람을 막아줄 카메라 가방을 챙겨서 비행기를 탔다. 덕분에 짐을 줄이지 못하고 위탁수하물 추가 결제를 해야 했지만 사소한 일에 열을 내기에는 이번 일정의 무게가 막중했다. 비교적 금방 이동하는 중국이나 일본도 아니고 4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베트남을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에 가는 이유는 이 여행이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는 워크숍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고 있는데, 써야 하는 글과 새로 촬영하면 좋은 사진들이 있기에 이것들을 짧은 해외 일정 속에 녹여내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에 무리해서 잡은 여행이다. 언제 어디선가 들어본 '소설 작가들이 집필 마무리를 위해 외딴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떠올리고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조금 거짓말이다. 대개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기괴하고 음산한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곤 하는데... 당연히 이번 하노이행이 그런 장르가 되진 않았다.
하노이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단 세 가지. 걷고, 찍고, 쓴다. 이외에 다른 일들은 일절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떠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 가지 행동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중간중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던 시간은 필수적인 것이니 고려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문제는 출발 전에 걱정했던 대로 날씨였다. 폭우가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도착한 날 저녁부터 돌아오는 날 점심까지 계속해서 부슬비가 내린 것. 물론 맑은 날씨에 찍는 사진만이 좋은 것은 아니고, 흐린 날씨에 촬영한 사진은 흐린 날씨대로의 분위기와 정취가 있다. 문제는 사진이 아니라 내 몸과 정신이었는데, 비 오는 날에 카메라를 메고 몸이 반쯤 젖은 채로 거리를 걸으며 카메라가 비에 푹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사진을 찍는 일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산을 써야 했기에 (우의를 입으면 카메라를 꺼낼 수가 없다.) 시야도 제한되는 기분. 덕분에 두 번째 날은 계획했던 만큼 걸어 다니지 못하고 몸이 차갑게 식은 채로 호텔로 서둘러 돌아와 누워있던 시간이 꽤 됐다.

목표에 충실했던 시간 말고는 역시 식사시간, 그리고 하노이 방문 시기에 맞게 아버지와 여행을 와있던 친구 M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억지로 빈틈을 내어 온 일정이었기에 내 숙소의 위치 말고는 아무것도 조사해오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여행지에서의 식도락을 즐기는 친구답게 이미 조사해온 식당이 여럿이었고 덕분에 혼자 먹는 식사들도 고민 없이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방문했던 식당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Phở Gia Truyền Bát Đàn'. 진한 고기 국물의 쌀국수를 파는 식당이었는데, 대강 썰어 넣은 고기까지 잔뜩 들어있어서 묘하게 맛있는 부산 돼지국밥의 향취가 났다. 그만큼 확실히 맛있다는 소리고 밥을 말아먹고 싶은 맛이었다. 그밖에 역시 분짜도 먹고 길거리에서 사 먹은 반미도 좋았다.
호텔에서 글을 쓰다 지루해서 찾게된 카페들 중, 방문하자마자 여기다 싶었던 곳은 'Tranquil Books Coffee'다. 외관으로는 큰 간판이 없어 한번에 찾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지도에만 남아있고 사라진 걸까 의심하며 건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허름한 입구와 계단을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2층 카페였다. 이름에 걸맞게 큰 책장이 있는 곳이었고,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보다는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펴놓고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용히 글을 쓰기에 안성맞춤인 분위기였다. 둘째 날과 셋째 날 두 번 연속으로 방문할 정도로 마음에 든 공간이 되었다. 비가 오는 탓에 테라스가 있는 1층 카페는 습해서 쾌적하게 앉아있기 힘들었는데 이곳은 그런 문제도 없었다. 커피 외에 곁들일 메뉴로 와플을 판다는 점도 개인적인 플러스 요소.
호치민 여행 때도 느꼈지만 코비드 이전에 애용했던 앱 트립어드바이저는 당분간 제대로 된 사용이 힘들 것 같다. 3년 정도의 시간 동안 폐점한 식당들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앱 정보에 반영되어있지 않아서 마지막 후기가 1년을 넘긴 곳이라면 대부분 폐업해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구글맵의 정보가 차라리 업데이트가 잘 되어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 식당 하나를 찍어서 방문할 수 있는 시기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현재는 3~4개의 옵션을 염두에 두고 가야 그중 생존해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 후보 옵션이 없다면 오늘의 나처럼 주변에 갈만한 식당이 안 보여서 KFC에서 식사를 해결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KFC는 맛있고 해외에서 프랜차이즈 식당을 방문하는 건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3일간 이어진 워크숍(자칭)의 결과물은 사실 대단하지 않다. 이 글을 포함해 글은 세 토막 정도를 썼을 뿐이고, 최대한 많이 걷고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지만 걸어 다닌 시간 대비 실제로 카메라를 들게 된 횟수는 많지 않아서 그 사진들 중 서울로 돌아가서 최종 작업까지 옮길 이미지가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출발 전 기대했던 최대치에는 역시 한참 못 미친 성적. 그렇지만 이런 방식의 워크숍(자칭)을 한 것 자체가 후회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런 방식을 다시 사용해 타국으로 향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물을 많이 내지는 못했어도 걸으면서 생각정리를 많이 했기에 글의 토대가 되는 흐름을 결정할 수 있었고, 그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이유인 사진집을 어떤 결로 진행해야겠다고 머릿속 정리를 해낼 수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는데 그것을 해낸 것 만으로 이 3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새로운 여행 방식을 하나 실행해 본 것도 큰 의미가 있을 테고.
보다 편한 해외여행이 가능해진 이후 첫 여행지와 두번째 여행지가 모두 베트남이었으니 아마 당분간은 이 나라보다 다른 나라로 향하는 비행 편을 유심히 살펴보게 될 것 같다. 이미 당장은 한 달 후 친구들과 함께 하는 도쿄행이 예정되어 있고... 내년엔 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겠지. 새로운 행선지로 떠날 때마다 이번의 하노이 행처럼 색다른 접근방식으로 여행을 하는 것도 염두해봐야겠다. 언젠가 향채가 가득 들어간 국물이 생각날 때 베트남 생각을 다시 하게 되겠지. 그때는 좀 더 능숙한 여행자가 되어있기를. 오토바이를 가르고 길을 횡단하는 것에 다소 지쳐버린 한국인은 이만 노이바이 공항을 떠납니다. 다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