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 것들 #09
한 달 내내 다소 온전히 무언가에 몰입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어떤 것이든지 적당히 듣고, 적당히 봤다. 감상할 작품을 고르는 데에도 영향을 미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를 몰아세울 작품은 피하고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즐겼다. 그 때문에 접한 컨텐츠는 많은데 이 글에 적을 만한 것들은 많지가 않다.
음악
01. Whitney - Spark
앨범 설명글을 보자면 아티스트를 '빈티지와 모던 사이 위치한 충실하고 신중한 클래식 팝/R&B 듀오 WHITNEY'라고 소개하고 있다. 정말이지 그렇다. 파괴력이 있는 트랙들을 선사하는 뮤지션은 아니지만 매 앨범이 듣기 편안하다. 이번 앨범도 그렇고, 어떤 트랙이 참 좋다고 꼽기는 힘들지만 가끔씩 오랫동안 듣게 될 앨범.
02. HYBS - Making Steak
태국 팝 듀오의 앨범. 그간 오랫동안 싱글로 정식 발매된 몇 곡만 듣다가 드디어 8트랙의 앨범이 올라왔다. 이런 분위기의 음악을 멜로우 팝이라고 하는지 다른 특정한 장르명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Mellow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일관된 분위기의 8곡이 담겼다. Phum Viphurit에 이어 두 번째로 즐겨 듣게 된 태국 뮤지션이 되었다. 신곡도 좋지만, 아직 귀에 제일 잘 남아있는 것은 역시 'Dancing with my phone'.
03. 검정치마 - TEEN TROUBLES
앨범을 낼 때마다 어떤 톤으로 만들었을지 예측이 잘 안되는 뮤지션의 신보. 'TEAM BABY'와 'Good Luck To You, Girl Scout!'의 말랑함도, 'THIRSTY'의 그로테스크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 대중적으로 성공할만한 톤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오히려 좋아. 몇 번을 돌려 듣다 보니 'Min (미는 남자)'가 귀에 걸린다.
04. Chad Lawson - breathe
서글프고 따뜻하다. 아직 이 아티스트의 다른 앨범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천천히 꼭꼭 씹어 들어 볼 예정.
영상
01 브루클린 나인-나인 시즌 8
드디어 대망의 시즌 피날레. 이 시리즈가 정말로 웃긴 것 같다고 생각한 시즌에서 이미 한참 지나왔지만, 그래도 관록이 있고 동시에 시의성도 있다. 10화의 비교적 짧은 구성에 아마도 당시의 화두였던 'Black Lives Matter'에 대한 작가진의 대답으로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섞여 있고, 동시에 시리즈의 마지막인 만큼 시즌에 반복되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집대성해서 (지나!) 무난하게 시리즈를 끝내주었다. 물론 아쉬운 점을 꼽자면 너무 무난한 노선을 택한 것은 아닌가 싶긴 하지만, 같은 캐릭터와 화법을 가지고 8개의 시즌을 끌어온 드라마의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하는 게 정답이지 않나 싶다.
게임
01. 고스트 러너
기존의 작품 정보만 봤을 때에는 어려운 난이도를 반복된 시도와 피지컬로 클리어하는 게임으로 보여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꽤 상쾌한 게임 조작감과, 반복적인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최소화 해주는 아주 빠른 부활 템포로 인해서 전반적으로 즐겁게 클리어했다. 다소 짧은 듯싶은 게임의 분량도 이 게임의 빠듯한 난이도에 어울린다. 좀 더 질질 끄는 내용이었다면 피로해졌을 것 같다. 다만 후속작이 나온다면 흥미로운 세계관에 대한 연출이 더 꼼꼼하게 들어갔으면 어떠려나 싶다.
02.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예상외의 대발견. 게임 발매 후 이렇다 할 큰 반향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게임을 못 만들었나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요즘 게임들에서 볼 수 없는 농도로 싱글 플레이에 올인한 작품. 다소 뻔해 보이는 전투시스템을 상쇄할 만큼 가오갤 멤버들의 캐릭터성을 활용한 대사들도 재밌고 시각효과도 개성적이고 수준이 높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자막에 문제가 있어서 캐릭터들의 대사가 잘려 나오는 일이 굉장히 잦다. 이 오류가 다른 게임보다 이 게임에서 더욱 큰 문제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가오갤 멤버들의 티키타카 개그를 알아차리기 어려운데다가, 정말 중요한 게임적 설정을 풀어내는 대사들도 간혹 잘려 나와버리기 때문. 제작사에서도 이 문제를 느리게 인지하고 패치를 한번 했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에 플레이한 나도 굉장히 많은 숫자의 자막 오류를 접했다. 열심히 제작해놓고도 자막 하나로 게임 경험이 반토막 나버리는 점이 굉장히 아쉬운 작품.
03. 에디스 핀치의 유산
'에브리바디 곤 투 더 랩쳐' 이후로 두 번째 플레이한 워킹 시뮬레이터 장르의 게임. 적당히 서늘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잘 쓴 소설책 한 권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발매 후 5년이 지난 시점에 플레이했고, 발매 시점의 고평가를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기대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했다. 정보가 없을 때 플레이했다면 더 즐거웠을 것 같은 아쉬움.
04. 케나 : 브릿지 오브 스피릿
이 아트워크에 이 게임 경험이 붙는다는 말이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기묘한 균형의 게임. 게임의 아트웍은 디즈니나 드림웍스의 그것이 생각날 정도로 따뜻한 애니메이션풍인데, 게임의 난이도(보통 기준)는 웬만한 라이트 게이머는 진행을 못 했을 것 같을 정도로 타이트하다. 항간에는 '디즈니소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는 모양인데, 최약체로 등장하는 적들에게 실수로라도 두세대 맞으면 금세 체력이 바닥나는 것을 보면 그런 별명이 붙을 만하다고 느껴진다. AAA 게임은 아닌지라 다소 빈약해 보이는 디테일과 짧은 스토리, 어디서 본 듯한 게임성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 단점을 참고 플레이할 정도의 완성도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시각적인 풍경 말고도 캐릭터의 모션도 완성도가 좋아서 특정 디테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포인트가 있을 정도. 모션으로 주목받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도. 하나만 꼽자면 '명상할 때 순간적으로 흩날리는 케나의 머리카락' 모션이 있다. 보다 나은 완성도와 스케일로 만들어질 제작사의 차기작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