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품평하는 능력
2022년에 인간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품평하는 행위를 해도 되는 걸까. '이 사람은 얼굴의 이 각도가 장점이네, 몸의 이 부분은 문제가 있네. 이대로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는 없으니까 고치고 내보내야겠다.' 미인 대회의 심사위원석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아니고, 성형외과 상담실도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이돌 연습생을 두고 고민하는 회의실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아니다. 슬프게도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업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자주 쓰는 피사체라는 말은 '사진(寫眞)을 찍는 데에 그 대상(對象)이 되는 물건(物件).'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피사체라는 사진을 찍히는 물건이라는 뜻의 단어를 아무런 거부감없이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곤 한다. 그 말처럼 사진기에 촬영되는 인간은 손끝으로 셔터를 한번 누르는 순간마다 사진이라는 '데이터=물건'으로 변형되어 내 손 안으로 들어와 외장하드 속 분류별 카테고리 안에 정리되어 쌓인다. 나의 생업을 과격하게 규정한다면, 인간을 사물화하고, 분류하며, 어떤 인간의 모습이 잘 팔릴지 평가하고 골라내 제안하고, 그것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면 촬영된 사람의 동의 없이 장점은 부각되게, 단점은 사라지게 변형하고, 대중에겐 수정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숨겨놓는 직업이다. 과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면, 상업 사진가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처음으로 이런 미묘한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로 몇 번 진행했던 강남의 모 클럽 프레스 일이 떠오른다. 주말마다 진행되는 파티의 모습을 홈페이지에 업로드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일이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요구받은 것은 명확했다. '예쁜 여자를 찍을 것. 외국인이면 더 좋다. VIP 구역이 물(?)이 좋으니 잘 노려볼 것.' 그런 사진들이 클럽의 매상을 올려준다는 것을 담당자 모두가 잘 알고 있기에 요청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보통 밤늦게 클럽으로 출근해서 3시간 정도 촬영하고 피크타임이 지나면 퇴근하는 방식이었는데, 촬영의 기술적인 측면은 어렵지 않았다. 플래시 광량 세팅만 잘해두면 클럽의 적당한 조명과 함께 그럴듯한 사진이 나왔으니까. 결국 '사진을 건졌다'고 할 수 있으려면 '찍힐 만한 사람'을 일정 숫자 이상 찾아내야만 했고, 나의 최대 과제는 춤추는 사람들의 얼굴과 몸을 재빨리 스캔하면서 '찍을만한지' 판단하는 일이었다. 클럽 문화에 별 관심이 없었고 생활 리듬이 망가지는 일이어서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 일련의 스캔 과정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찝찝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여러 가지 종류의 일들을 경험해보면서 점차 내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일을 보다 더 많이 하게 되었기에 이젠 클럽 프레스 같은 종류의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일임에도, 사람을 촬영하는 일을 하고 있노라면 과연 내가 하는 업무의 방식이 그때 그 클럽에서 '예쁜+외국인+여자'를 찾아다니던 감각과 완전히 단절돼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 감각은 대체로 촬영 당시보다 촬영본을 모니터에 늘어놓고 '셀렉트'하는 과정에서 더 자주 느끼게 되고, '리터칭' 작업을 진행하면서는 거의 항상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을 마음 한켠에 숨겨놓고 일을 한다.
상업사진가라는 직업을 지속하려면 겉보기보다 훨씬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일을 하는 나 자신의 입장이고, 결국 타인에 의해서 평가받는 제일 중요한 능력은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찍는 능력'일 것이다. 제품이라면 제품, 인물이라면 인물이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잘 나와야' 한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일할 때 인간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품평하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는 이유다. 단점을 찾아내어 지우고 장점을 찾아내서 부각해야 '잘 나오니까'.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이 단점이고 무엇이 장점인지는 아무도 보편적인 기준을 세워주지 않는다.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나 자신만의 미적 취향이 기준이 된다. 요즘에 와서는 일괄적으로 미적 취향을 적용시키는 것이 미묘해지는 일도 자주 생긴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여성을 촬영했을 때, 남성인 나 자신의 미적 기준으로 외모를 수정하는 행위가 옳은가? 사진 촬영장임을 알면서도 메이크업하지 않은 채로 온 모델의 얼굴과 몸에 드러난 잡티를 제거해야 하나? 잘 보이는 곳에 존재하는 흉터는 지워야할까 살려야 할까?
제일 교과서적인 정답은 '당사자의 의도대로 진행한다.'일 것이다. 하지만 업무 과정에서 내가 모든 모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한 프로젝트당 수십 컷을 작업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기에, 한 컷을 작업할 때 어느 정도로 수정해야 옳은 것인지 고민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대개는 별 생각 없이 턱을 깎고 피부를 매끈하게 하고 피부톤을 밝힌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의 크기와 다리의 길이를 조절해 신체 비율을 재조립하기도 한다. 어디를 얼마나 수정해야 하는가 하는 진단은 사진을 보자마자 내려진다. 빠르게 작업을 해치우고, 다른 사진으로 넘어가 다시 진단하고. 다시 다른 사진으로... 이런 방식에 대안은 과연 없는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잠시 미뤄진다. 오늘도 일단 마감이 먼저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사진이란 프레임 안에 무엇을 넣고 뺄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논리가 세워진 시절에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적용되었던 논리일 테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도 원리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미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워낼지를 결정하는 것.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로서 몇 년을 일하고 있지만 이 행위를 결정하는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래에도 여전히 모르는 상태로 일을 계속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그리고 모른다는 것을 깨달을 때보다 더 서늘한 순간은 과연 내가 업무에 활용하는 '인간을 품평하는 행위' 모드를 과연 일상 생활 속에서 완전히 비활성화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