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엔 오리가 있다.
작업실로 출퇴근하는 길을 걸어 다니기 시작한 지 벌써 5주가 되어간다. 쏟아지는 생각과 그로 인한 피로감, 무기력을 헤쳐나가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도망 다니듯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면 12분, 버스를 타면 배차간격 운이 특별히 없는 날이 아니라면 15분 정도 걸리는 길을 굳이 30분이 넘는 시간을 걸어서 다닌다. 걷는 일은 그 자체로는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조건이 함께한다면 확실한 기분 전환 효과가 보장된 방법이다. 지금 떠오르는 것만 나열해 보자면 - 1. 도착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될 것. 2. 걷기 좋은 온도와 날씨일 것. 3. 그날의 선곡이 알맞을 것. 4. 지나치는 풍경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을 것 정도. 온도와 날씨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나머지는 내 의지로 얼추 갖추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끔 삐딱선을 타고 싶을 때는 굳이 골목길과 언덕길을 돌아돌아 가기도 하지만, 요즘의 대부분의 코스는 집과 작업실 사이에 놓인 불광천을 따라 걷는 것이다.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거리의 짧은 거리.
이 짧은 거리는 아주 단순한 직선거리지만 다른 루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 흐르는 물이 있고, 비교적 트인 전망이 있고, 이 산책길에 오리가 있다. 그리고 물론 그 밖에 목이 긴 새들과, 어디에나 있는 비둘기들과, 산책에 대한 열망으로 팽팽한 줄에 몸을 기울인 강아지들도 잔뜩 있다. 비둘기를 빼곤 나머지들도 좋아하지만, 최근 5주간을 지나오면서 더 사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오리다. 녹색의 광택과 갈색이 아름다운 청둥오리들. 가끔 보이는 물닭들, 그리고 평소엔 잘 안 보였던 것 같은데 요즘엔 짧은 산책길에 두세 마리는 볼 수 있는 백로와 왜가리들. 가끔 잘 모르는 색과 무늬를 가진 새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새 백과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어떤 새인지 찾아볼 날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유독 이런 처음 보는 새들은 경계심도 많아 사진을 찍어놓으려고 하면 곧 날아가 버리더라고.
오리들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산책을 시작하던 시점보다 더 이른 1월 즈음부터였는데, 아직 날씨가 꽤 추웠는데도 신기하게 오리들은 그 찬물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떠다니면서 가끔 물속으로 머리를 넣었다 빼곤 했다. 잠도 축축한 돌 위에서 그대로 자는 듯하고. 어린 시절부터 철새라는 이미지로 알고 있어서 곧 보이지 않겠거니 싶었는데, 얼마 전에 찾아보니 온난화의 영향으로 텃새화가 되었다고 해서 조금 안심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먹이가 없을 것 같은 뿌연 불광천 속에서도 잘만 고개를 물속으로 넣어 기특하게도 뭔가를 찾아 입에 넣곤 한다. 이럴 때 조금 수심이 있는 물위에 떠있는 녀석들은 최대한 밑으로 부리를 넣기 위해 주황색 발을 퍼덕이면서 엉덩이만 수면 위에 띄워 놓게 되는데 이 모습이 참 귀엽다. 걸으면서 가다가 이 모습이 보이면 길을 멈추고 아이폰 카메라를 들어서 촬영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왠지 기록해놓고 어딘가에 써먹고 싶어서 (몇 년째 계획만 하고 있는 작업실 영화 파티 이미지로 쓰고 싶어서) 일할 때 쓰는 큰 카메라를 들고나가서 촬영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출근하면서 이 새 녀석들을 지켜보다 보니, 그냥 자전거를 타면서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떠 있는 모습 이외에 많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양이가 그루밍 하듯 두런두런 모여서 자기 깃털을 손질하는 오리들 이라던지, 영역싸움이라도 하는지 다가온 오리를 순간적으로 덮치듯 쫒아내 버리는 모습들. 징검다리 근처 특정 자리에 자주 출몰하는 거대한 몸집의 오리 한 마리. 밤에는 다리 밑에서 자주 보이는 백로들. 새끼 오리들은 어른 오리와는 다르게 오랫동안 잠수를 해서 꽤 멀리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멋지게 서 있기만 하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싶었던 백로가 물 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고기를 사냥해 목으로 집어넣는 모습까지. 이 장면은 심지어 내가 촬영하던 영상에 담겼는데 이걸 포착하고서 그날 종일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어느새 출근길과 퇴근길은 새들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묘한 기대감을 주는 하루의 이벤트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새삼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이리저리 걸으며 예상치 못한 모습들을 관찰하는 일은 나에게 항상 여행을 떠올리게 하니까. 코로나 시국의 현실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삶 속에서 이 산책이 내게 작은 여행 같은 의미로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씁쓸한 의미부여 일수도! 하지만 작은 의미부여라도 필요한 시기를 지나오고 있기 때문에 틈틈이 찾아오는 자기의심은 외면하려고 한다. 당분간은 그저 가끔 찾아올 즐거운 새들의 모습을 찾아 어슬렁거려봐야겠다. 언젠가 포착한 모습들을 정리해서 한 번에 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