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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와 희망

서곡 2022. 5. 10. 20:14

 

당분간 일을 멈추고 쉬어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지금까지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해왔던 여러 해소 방식들을 똑같이 답습해도 되는 걸까? 예컨대 여행, 게임, 잠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쉰다면, 같은 방식으로 살아와서 생긴 내 문제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다시 비슷한 문제가 쌓여서 터지면 그것을 위해 비슷하게 고군분투하는 삶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휴식이 대체 무엇일지를 고민하며 수락해놓은 일들에 책임을 다하며 버티는 동안 시간은 빈틈없이 흘렀고 어느새 휴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날짜가 다가왔다. 특별히 계획은 없었지만 보다 마음 편한 휴식을 위해서 집과 작업실 대청소를 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진공청소기로 바닥을 청소하고, 새로 주문한 먼지떨이로 보이지 않는 곳에 쌓인 먼지들을 없애고, 물걸레 청소포로 바닥을 문질렀다. 바빴다는 핑계로 정리를 미뤄뒀던 잡동사니들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는 향을 하나 피웠다. 이제 다 끝내고 쉬어야지 하는데, 코에서 언젠가 익숙했던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휴식을 앞두고 계획한 마지막 업무인 대청소를 마치자마자 코피가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딱 이런 타이밍에 코피가 나지?' 작업실 동료와 웃으며 몇 마디를 나눴다. 대체 언제가 마지막 코피였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휴지를 대충 구겨 코를 막은 기억은 적어도 2, 3년 안에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내 이성적인 생각에 의심을 가져보는 일을 자주 하곤 하는데, 이 기막힌 타이밍의 코피에 대해서 혹시 이것이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소박한 음모론을 펼쳐보았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긴장이 풀려 나는 몸의 신호 쪽으로의 해석도 해보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몸과 정신이 보내는 최후의 SOS 신호라는 다소 끔찍한 해석도 해봤다. 과학적으론 언젠가부터 안 먹고 있는 종합비타민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찌 되었건 코피와 함께 시작하는 휴식이라니 굉장히 명확한 시각적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은 연출의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리고 시간은 또다시 빈틈없이 흘러 약 8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이 글을 쓰는 오늘 이 시간이 되었다. 영화에서 'n일 후...'라는 텍스트가 등장한다면 그 이후의 주인공은 이전과 뭐라도 달라져 있는 모습이었을 텐데, 다시 말하지만 내 인생은 연출의 결과물이 아니고 나는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태로 연희동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입은 옷도 얼굴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간 필라테스 수업을 열심히 나갔으니 허리와 어깨가 좀 더 펴지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이 문장을 쓰자마자 허리가 구부정한 채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괜히 허리를 세워보았다. 약 두 달간의 휴식은 나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최근엔 잘 작동하지 않는 머릿속 긍정 회로에 전류를 흘려보내서 떠올려보고 기록해보자. 

 

1) 두 달 동안 평소의 페이스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사람들을 만났다. 한참 지쳐있을 때 나를 괴롭혔던 제일 큰 이유가 고립감이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도 있고, 일을 안 하다 보니 연속으로 약속을 잡아도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다. 최소한 내 주변에 누가 남아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상태가 안 좋을 때 도저히 할 수가 없었던 원래 하던 휴식 루틴을 점차 다시 할 수 있게 회복되었다. 낮잠, 게임, 혼자 영화 보기,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사진찍기.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같은 방식으로 쉬면 같은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자기 의심에서 아주 조금은 벗어났다. 아직 한참 남아있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미래의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

 

3) 필라테스를 꾸준히 했다. 허리 통증이 많이 사라졌고 이제 오래 누워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더 게을러진 감도 있지만... 어쨌든 코어 근육량은 확실히 늘었을 것이다. 금액이 비싸서 조금만 배우고 수영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효과가 확실히 있으니 그만두기를 결심하는 게 쉽지 않다.

 

4) 취미로 시작한 보컬 수업을 2달째 진행하고 있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망가진 발성을 재활치료 한다는 명목으로 시작했고 이제 그 부분은 완벽하게 회복이 되었다. 이제 슬슬 노래방을 가도 코로나 신경이 안 쓰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으니 좀 더 자주 노래방을 가보자.

 

5) 만들고 싶은 것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대개는 큰 의미 없지만 그냥 하고 싶어서 만드는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감각이 오랫동안 메말라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이 감각이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지를 몰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 같다. 왠지 1년 정도 쉬면 다시 사진집을 만들거나 전시를 하고싶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1년 동안 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다시 일을 시작하고서 이 미약한 창작 욕구 화분의 흙을 마르게 하지 않도록 잘 돌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휴식의 결과물을 더 생각해내기 전에, 애초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행위 자체가 두 달간의 휴식이 내게 준 제일 큰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는 건 어쨌건 하고자 하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고 그것은 확실히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아무도 시키지 않은 글을 써내고 있다는 것이 그간의 내 모습에 비추어 보면 꽤 신기한 일이다. 바빠진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글쓰기와 멀어진 생활을 할 수도 있겠다는 슬픈 예감이 들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쁨을 잘 컨트롤 하는 것이 또한 미래의 내 역할일 것이다. 생각을 언어화해서 글로 옮겨쓰는 것이 내 스스로에게 주는 좋은 효과를 잊지 말고 꾸준히 해내 보라구, 미래의 나야. 일단 메모 앱에 휘갈겨놓은 글감들 너무 묵히지 말고 문장을 좀 짜내 보자. 미래의 나에게 여러 가지를 맡겨서 좀 미안하긴 하네. 하지만 너 밖에는 희망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