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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섬 쌓기 #2

서곡 2022. 5. 2. 14:55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완성하지 못했던 문장완성 검사지와 기본 심리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추가 검사지(TCI, MMPI-2)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상담센터에 앉아서 작성할 필요는 없고 집에서 따로 작성한 후 답안지만을 촬영해서 센터 계정으로 보내주면 된다고 했다. 틈틈이 나눠서 하면 검사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으니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최대한 한 번에 검사를 진행하는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힘들고 우울한 상황에 빠져 있더라도 그 버거운 상황속에서 내가 반응하는 특정 생각 자체가 어이없고 재밌어서 기억에 남는 경험을 몇 번 했는데 그중 한 번이 이때 느낀 '드디어 제대로 심리 검사를 해보겠다'는 성취감이었다. MBTI가 대한민국 전 세대의 스몰 토크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제대로 공인된 검사를 해볼 거라는 어이없는 즐거움을 느끼고는 마음속으로 조금 웃었다. 객관식 심리 검사 자체는 지루했지만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신뢰도를 위한 장치일 것인 '반복되는 질문의 미묘한 변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살면서 종종 해왔던 심리테스트에서 크게 벗어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역시 문장완성 검사였다. 상담센터에서 막혔던 질문은 집에 돌아와서도 막연했다. 잠시간의 고민을 하다가, 내가 다운되어서 받는 심리 검사인데 평소 나의 모습을 고려하지 않고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마도 평소보다는 과도할 것임이 분명한) 부정적인 단어들을 휘갈겨 써버리자고 결심하고 실제로 빠르게 작성을 마친 후 답안지를 촬영해 센터로 보냈다. 이는 앞으로 받게 될 결과지에서 다소 파격적으로 반사회적인 느낌을 주는 해석본으로 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약 일주일 후, 해석 상담이라는 것을 받으러 상담센터로 향했다. 이미 첫 상담에서 말하기 힘든 부분은 다 토해냈기도 하고, 일주일 사이에 마음에 위로가 되는 몇 가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보다는 훨씬 맑은 머리로 방문할 수 있었다. 결과지는 센터 측에서 두가지의 ㅇㅇ검사와 문장완성 검사를 모두 고려해 정리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검사 결과를 수치로 나타낸 것과 그것을 간단하게 해석한 텍스트, 그리고 문장완성 검사의 연관된 완성 문장이 일종의 증명처럼 덧붙여진 구성이었다. 지면상으로만 훑어보았을 때는 내가 꽤나 문제적 인간인 것처럼 느껴지는 항목들이 눈에 보여서 상담사가 대체 어떤 말을 덧붙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실제로 상담사의 언어로 해석해주는 번역은 결과지의 고루하고 날 선 단어들보다 훨씬 일상적이었고 정상궤도에서 크게 이탈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같은 데이터에서 나오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온도의 해석이 꽤 흥미로웠고 이것들이 흔히 각종 경험담들에서 등장하는 '나에게 맞는 좋은 상담사'를 결정하는 큰 능력 중 하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분석 결과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기록해보려 한다. TCI 검사 결과로 '자극 추구'에 관한 백분위 수치가 78이 나왔고, 그 카테고리 안에서도 하위항목인 '탐색적 흥분'과 '자유분방'에 관한 수치가 높게 나왔다. 그런데 동시에 '위험회피'에 관한 백분위 수치가 95나 나온 것이다. 하위항목 중에서는 '예기불안'과 '낯선 사람에 대한 수줍음'에 관한 수치가 아주 높게 나왔다. 자극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다가올 수 있는 위험은 최대한 회피하고 싶은 사람인 것이다. 이 수치에 대한 분석을 듣자마자 나의 여행 습관이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다니는 것을 몹시 좋아하고, 가봤던 곳을 계속 방문하는 것 보다는 안 가본 곳을 가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여행 예찬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행지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게스트하우스나 동행을 혐오하고, 혼자 나만의 페이스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행이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자극, 새로운 도시에 대한 자극은 너무나 좋아하지만, 예측하기 힘들고 템포를 맞춰 주어야 하는 '낯선 사람'과의 상호작용은 극도로 꺼리는 여행자. 이 검사 결과가 이런 나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만 같아 흥미로웠다. 

 

첫 심리검사 해석의 은근한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험도 있었다. 첫 상담의 미묘한 불신에 이어서, 두 번째 해석 상담에서마저 나는 상담사를 마음속 흰 눈으로 보게 만드는 지점을 포착해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결과지 항목 중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표기된 항목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나의 결과가 두 항목의 수치가 비등하게 나왔다. 그 결과에 달린 항목의 주석이 '광범위한 취미, 심미적인 흥미' 였기에 나는 상담사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했다. 상담사는 (실제 단어 선택은 달랐을 수 있다) '남성성은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여성성이라는 것은 좀 더 배려하고 남을 잘 돌보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중략) 보통 이렇게 수치가 나오면 성 정체성의 혼란이 있거나, 동성애자이거나 한데 OO 씨는 그런 것은 아니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과지의 '남성성', '여성성'의 규정 자체도 짜증이 나지만, 이는 이 검사방식이 1989년에 MMPI-2로 개정되고 다시 새로운 버전이 2008년에 개정되었다고 설명되어있는 위키피디아의 정보를 통해 어느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애써 이해해 볼 수가 있다. 마지막 업데이트 기준으로도 무려 14년 전의 항목이고 그 이전의 업데이트를 기준 삼으면 무려 33년이나 된 항목이니까. 하지만 2022년의 상담사가 이 항목을 충분한 설명 없이 그대로 번역해 들려준다는 점은 꽤 실망스러웠다. 더군다나 성 정체성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온갖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상담사가 두 번째 상담에서 할 단어 선택은 절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이성애자 남성인 것은 (운 좋게) 맞지만, 당신이 그렇게 무심하게 이리저리 말을 던지다 보면 틀린 경우가 분명 생길 거라고요. 하지만 나름대로 사회생활 n년차 인간답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하하 웃으면서 대충 대답했다. '아, 그런 거군요!'

 

보고서의 마지막에는 검사 데이터를 통해 도출된 '적절한 정서적 개입 방법' 항목들이 적혀있었다. 그것을 훑어보다가 도저히 되묻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항목이 하나 보였다. 바로 '모래놀이 심리치료'.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그런 그림의 그런 놀이 치료일까? 근데 그건 보통 어린아이들의 치료를 위해 하는 방식이 아닌가... 33살의 내가 모래로 놀이를 한다면 그 행동엔 대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내가 묻자 상담사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표면의 생각이 아니라 내재된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에요.'. 나는 전혀 설득되지 않아 다소 장황하게 나의 걱정을 늘어놨다. '저는 어쨌든 미술교육을 오래 받아온 사람이고, 시각적인 것을 업무로 다루는데 익숙해진 사람이라 모래로 어떤 것을 만든다고 했을 때 도저히 마음속 깊은 곳의 무언가가 드러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상담사는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곤 나의 경우엔 현재 스스로 상태가 좋아지고 있고 검사 결과에서도 크게 심각한 수치가 나오지는 않아서 장기 상담보다는 일단 4회기의 상담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나는 '모래놀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바로 4회기의 상담을 하겠노라고 확답할 수가 없었다. '제가 어차피 다음 주에는 시간이 안 되어서, 상담받을 수 있을 때 다시 연락해서 상담 약속을 잡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의문스런 마음으로 작업실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엔 두 번의 상담에서 상담사에게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 때문에 다른 상담센터를 알아보거나 얼마 전처럼 유명한 정신의학과를 다시 신청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피어오르는 '모래놀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떨칠 수 없는 호기심, 한 분야의 전문가에 대한 막연한 신뢰, 상담을 처음 받아본 주제에 맞는 상담 틀린 상담을 어떻게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있나 하는 의문, 피드백에 대한 어떤 기대도 되지 않더라도 내 감정을 말로 들려주는 것 자체에서 오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며칠 생각한 끝에 나는 상담센터에 연락해서 4회기의 상담 예약을 잡고 비용을 결제하고야 만다. 

 

- 계속 -